지난 몇 개월의 국내 정치의 전개 과정을 바라보면서, 한국의 민주, 민족운동 주체들의 사고가 폐쇄적이고 독선적으로 경직되어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독선은 분단, 전쟁, 군사쿠데타 등 격동의 현대사를 몸으로 부딪치면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지켜온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관, 그리고 이 가치관을 끝까지 수호하기 위한 전략이 폐쇄적인 자위수단을 필요로 했던 주변 환경의 요구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민중들의 절대적 지지를 확보했던 반독재, 반수구, 그리고 시민정부의 수립을 위한 직접민주주의의 시대적 요구가 일부 정당 정치인들의 독선적 아집, 기득권에의 집착,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는 민중의 염원을 읽지 못한 근시적 실착(失錯)으로 획기적 대변혁의 분화구로 표출되는 기회를 차단당했다.
이것은 주변의 정지적 상황에서 그 원인 혹은 책임을 찾을 수 있는 논란의 영역에 속하는 사안이 아니라는 데 그 비극이 있다. 문제는 바로 이 패착이 60년대 이후 반세기 동안 수많은 생명을 희생양으로 바쳐 어렵게 이룩한 모든 변혁의 가치들이 일순에 전제주의적 ‘승자독식’의 블랙홀에 흡입, 무산(霧散)되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점이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원칙주의를 신봉했던 나는 안타까운 심정에서 등소평의 실용주의를 다시 생각해 본다. “쥐를 잡는데 흰 고양이(白描)면 어떻고, 검은 고양이(黑猫)면 어떻습니까?” 검은 쥐를 잡는 데는 꼭 흰 고양이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그런 구도를 원칙으로 신봉해 온 사고 속에 스스로 자신을 포박하는 경직된 사고에서 나온 프로크루스테스적 패러다임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어떤 규범을 정해놓고, 자기도 그 규범의 포로가 되고, 남에게도 그 규범의 노예가 되기를 강요하는 것은 분명히 독선이고 아집이다. 그래서 칼 막스는 그의 스승 헤겔의 형이상학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라고 비판했다.
우리 모두 냉철한 반성, 자기성찰이 필요한 것 같다. 지난 대선의 교훈은 통합민주 세력의 지도부가 사즉생(死卽生)의 우주적 질서에 좀 더 다가가, 대중과 대의에 봉사하는 희생정신으로 거듭나는 것이 민주, 민족운동이 제1단계로 추구해야 할 목표라는 점을 깨우쳐 준 것으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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