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10년 쯤 되었을 무렵, 책방에 갔을 때 ‘반스 앤 노블 상’을 탄 책 한권이 눈에 띄었다. 제목보다 먼저 동양 얼굴이 그려진 책 표지에 허리에 권총을 차고 카우보이모자를 쓴 동양 소년의 사진이 눈에 들어 온 것이다. 작가의 이름이 창래 리, 그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이 영어로 쓴 소설책을 보지 못했기에, 뒤적여 보지도 않고 무조건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ker)’를 샀었다.
두 아이 키우며, 일요일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를 다니며, 직장 일에 매여 있었던 나는 그 책을 단숨에 읽었다. 플러싱에서 벌어지는 정치이야기에는 별 흥미가 없었지만, 이민 2세인 소설의 주인공이 자라 온 환경이 바로 나의 생활이었다. 공원으로 야외예배를 간 부모님들이 불고기 구워 먹고, 또 남은 것으로 저녁까지 먹고 아이스박스를 기울여 물을 버리고 나서야 집으로 가는 장면에서는, 우리 교회가 자주 야외예배를 가곤 하던 아즐리의 ‘메이시 팍(Macy’s park)’이 눈앞에 그려졌었다. 이창래씨가 바로 아즐리에 살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거의 20년 세월 후 웨체스터 카운티의 인권의원으로 임명된 이승래씨가 이창래 씨의 사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왠지 잘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반가웠다. 최근 들어 웨체스터의 한인 커뮤니티가 로컬 정부와 많이 가까워진 크레딧을 이승래 씨에게로 돌린다고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커넥션을 십분 활용하는 ‘웨체스터 한인회’에게 이 곳 올드 타이머의 한 사람으로서 박수를 보낸다.
지난 주 아스토리노 웨체스터 카운티 장의 사무실에서 인턴 증명서를 받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서 싱싱한 바람을 느꼈다. 저 학생들이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었다.
8월 13일자 뉴욕 타임스의 한 블로그가 요즘 뉴욕 시장 선거에 등장하는 아시안계 리우(Liu),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스캔들 속의 웨이너(Weiner)가 이슈가 되면서, 이창래 씨의 ‘네이티브 스피커’를 놓고 토론을 했다. (http://cityroom.blogs.nytimes.com/2013/08/13/discussing-native-speaker)
이 블로그에 올라 온 20여개의 코멘트를 남 다른 마음으로 모두 읽었다. 소설이 쓰여진 당시엔 이민자가 열심히 뼈 빠지게 일하면 누구나 돈을 버는 시대였지만 지금 현실은 그렇지 않다며, 후세들이 살아갈 미국사회를 걱정하는 코멘트서부터,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If you shake anyone’s coat, there will always be dust.)는 한국 속담을 들먹이는 코멘트에까지, 이민자와 이민 후세, 동양적인 컬쳐와 흑인과 아시안이 겪는 인종차별 문제 등등…… 아마도 한국인 2세도 끼어있을 이 코멘트에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미국사회가 읽혀졌다.
당시 29세였던 이창래씨가 다루었던 한국인 정치가 이야기가 20년 후에 새삼스럽게 미국의 주요 미디어에서 재조명되는 것을 보며, 우리 동네에서 유권자 등록을 받느라 애쓴 저 학생들이 앞으로 20년 후에는 한국 성을 가진 정치인들이 되어 활동하고 있을 것을 상상해 본다. 그 때에 내 한 표가 얼마나 귀한 것이 될까.
요즘 같은 경제 불황 속에 어렵게 비즈니스를 운영하면서도, 커뮤니티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1세 한인들, 이들에게서 미국 사회에서 흔히들 쓰는 말 ‘변화를 가져온다―Make a Difference’란 말이 생각난다. 밤낮 없이 돈 벌어 자식 교육에 온 힘을 바친 우리 세대에게 이제 남은 희망은, 우리의 후세들이 당당하게 파워 있는 ‘네이티브 스피커’가 되는 날일 것이다.
노려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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