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승환의 고전산책 101
▶ 시간에 풍화된 내적 풍경 관조적으로 담아내
얼 그레이 차의 진한 향기를 맡으면 항상 눈 덮인 모스크바의 아름다운 모습이 떠오른다. 모스크바에서 겨울을 지낼 때 지하철역에서 아파트까지 꽁꽁 얼은 발을 동동 구르며 뛰어 들어와 얼른 물을 데워 얼 그레이 차를 한 잔 마실 때, 심신이 한꺼번에 녹아들었던 그 따듯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맛이나 향기를 통해 잠재돼 있는 의식, 기억이 떠오르는 현상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심리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자신의 기억과 회상을 추적하며 전 7권 약 4,000여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했다.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잃어버린 기억과 회상을 찾아서 나선 작가의 마음여행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프루스트는 이 소설을 통해서 20세기 현대문학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파이오니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프루스트 이전의 소설들은 사건과 사고 그리고 외적으로 진행되는 일들에 초점을 맞춰 스토리를 진행시켜 왔지만 프루스트는 시간에 풍화되어 버린 인생을 관조적으로 그리다 보니 철저하게 내적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바로 이 점이 프루스트 소설의 매력이지만 처음 대하는 사람으로서는 다소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프루스트의 소설은 전형적인 프랑스풍의 영화,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라고 시작하는 제1권의 글은 잠시 후 잠에서 깨어나 때로는 순간 몽롱한 상태로 추억의 영상이 또렷하게 그려지지 않는 상태, 즉 기억에 흔들림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고 고백하며 주인공 ‘나’의 소년시절을 환기시킨다.
소년이 매년 휴가를 보내러 간 시골마을 콩브레에는 2개의 산책길이 있다. 하나는 파리의 부르주아인 스왕가의 별장으로 향하는 길로 그 곳에는 스왕 집안의 딸 질베르트가 살고 있다. 또 하나의 길은 중세 때부터 내려온 명문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이다.
이 두 갈래 길은 소년인 ‘나’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두 개의 세계가 19세기 말에서 1차 세계대전 직후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서로 교차하며 융합해 가는 형태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질베르트와의 아련한 첫 사랑이 깨진 뒤 할머니와 노르망디 해변의 발베크로 가고, 그 곳 해변에서 알게 된 다른 소녀 알베르틴에게 끌리는 소년의 마음…프루스트 현상과 유사한 의미의 ‘데자뷰’란 단어는 과거에 어디선가 이미 봤던 것 같은 인상의 장소, 분위기를 다시 가보는 것을 의미한다. 세월호의 엄청난 비극을 보면서 ‘데자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보면서 떠오른 개인적인 ‘프루스트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대학가에 데모가 연일 계속되는 아수라장 속의 한국을 떠난 지 어느덧 30년이 지났건만 이번 사고를 통해 다시 만난 한국은 내가 떠나올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살 궁리에 바쁘고, 원인에 대해서는 발뺌 만하며 감정을 자극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허무한 데자뷰를 느낀다.
예찬출판기획 대표(baekstephe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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