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세.예의.인내심...서예는 단순한 글씨아닌 정신
▶ 서력 30년...미주지역 최초 여성 국전 초대작가
<사진 조진우 기자>
컴퓨터와 활자 인쇄, 스마트폰 시대에 진하고 옅은 먹, 굵고 가는 획, 빠르고 느린 붓놀림으로 고매한 정신을 전달하는 서예(書藝)를 30년 이상 미국 내에 전파하는 이들이 있다. 동아시아 문화의 우수성에 관심을 갖는 타인종이 증가하고 있는 요즘, 미주한인서화협회 전 회장 박원선 서예가를 만나본다
●새벽에 맡는 묵향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밤 12시반이나 한시에 일어나 새벽 4시까지 글씨를 쓴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 했다. 글씨는 곧 사람이다는 뜻이다. 새벽에 일어나 글씨를 쓰는 순간 너무 좋고 마음이 편안하다. 과거에는 또박 또박 잘 쓴 것이 눈에 들어왔으나 요즘은 투박하지만 순진하고 때 묻지 않은 글씨가 좋은 글씨라 여겨진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이 왜 명필인 지 알 것같다.”
새벽이면 베이사이드 집 지하에 마련된 서화실에서 은은한 묵향, 먹과 여백이 만드는 구도 속 오묘한 붓글씨의 세계에 빠져드는 박원선, 하지만 언제나 글씨가 잘 써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잘 쓰여 지지 않을 때는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는 글을 쓰기위한 준비작업으로 밑받침 줄긋기, 동그라미 그리기 등 밑작업을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
작년에 제20회 대한민국서예전람회에서 특선(예서, 초월 면암 최익현 선생 시)을 하여 미주지역 최초 ‘ 여성 국전 초대작가 ‘로 선정되었던 박원선은 서력 30년이 넘었다. 그런 그도 늘 글씨가 잘 쓰여지지 않는다고 하니 서예는 정말로 마음을 나타내는 그림이라 하겠다.
한국에서 5년간 배운 한글 서예로 고체(판본체, 민체, 서간체)와 궁체(정자체, 반흘림체, 흘림체, 진흘림체)를 모두 쓰는 그는 새벽마다 학생들에게 자습용으로 나눠줄 체본을 쓰고 있다. 2005년에는 문학시대를 통해 시조작가로 한국문단에 등단하기도 했다.
“학생들에게 판본체 한글을 가르치면서 옛시들이 너무 좋았다. 그 안에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이 다 들어있었다. 그러다가 내 것도 쓰고 싶었다.” 옛 성인들의 말과 시를 그대로 써보는 것도 공부가 되지만 본인 스스로 지은 싯귀를 붓으로 옮기며 더욱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현재 리틀넥 소재 서화협회 서실에는 월요반 16명, 목요반 7명, 토요반 4명 등 27명의 학생이 서예를 배우고 있는데 제자 중에는 초등학생과 중학생도 있다.
“보통 은퇴를 준비하는 40~50대 여성들이 많다. 이들에게 한국전 출품이나 공모전 준비를 많이 시킨다. 자연히 더 열심히 하게 된다. 요즘은 한국보다 뉴욕과 뉴저지지역에서 서예 바람이 더 부는 것같다. 작년 9월 앨리폰드팍에서 진행된 외국인들을 위한 서예교실은 호응이 상당히 좋았다.” 서예의 전통과 우수성에 관심을 가진 타인종들이 서로 자신의 이름을 써달라고 청한 것이다.
박원선은 1995년~2007년까지 12년간 한국입양아 문화캠프에서 서예 지도를 했고 퀸즈 뮤지엄 사군자 지도, 프레시 메도우 팍 아시안 문화 페스티벌, 퀸즈칼리지 아시안 페스티발, 퀸즈 도서관, 롱아일랜드 유니버시티, 아시안소사이어티, 설날 퍼레이드, 추석맞이 대잔치 등 한국문화가 열리는 곳이면 달려가 한인은 물론 타인종들에게 한글 이름, 가훈, 좌우명 써주기, 사군자와 카드 만들기, 붓글씨 체험, 낙관찍기 체험 등을 지도했다.
1995년부터 미주한인서화협회에서 서예지도를 해오고 있는 그에게 서예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큰 인내가 필요하다고 한다. “서예는 금방 되지 않는다. 86년 첫 학생이 온 이래 300여명이 배웠으나 현재 10명 정도 남았다. 붓 쥐는법, 줄긋기, 가로 세로 긋기, 동그라미 긋기 등 착실하게 기초부터 다져야 한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워야한다. 한 서체를 제대로 배우고 다른 서체를 공부해야한다. 자세도 반듯해야 글씨가 좋다. 예의범절도 중요하다. 인내심을 가지고 열심히 연습하다 보면 훌륭한 글씨를 완성할 수 있다”
오랜 기간 정진이 필요한 서예는 몸과 마음의 수양이 될 수 있으니 삭막한 이민생활에 풍요로운 삶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풀고 치매를 예방하는 장점도 있다. “아이들에게 서예를 시키면 반복 연습을 하니 한글을 안 잊어버리게 된다. 급하던 성격과 정서도 교정되고, 2세들과 외국인 자녀에게도 서예 교실을 개방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
1941년 서울에서 7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박원선은 고서화와 서예가 늘 가까이 있는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아버지가 펜으로 글씨도 쓰지만 붓으로 글을 많이 쓰셨다. 종종 아버지께 먹을 갈아 드렸다.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억지로 먹을 갈던 어릴 적 생각이 난다”는 그는 65년 결혼한 신혼집에 벽이 비어있으면 친정의 고서화를 하나씩 가져다 걸 정도로 옛것은 그에게 친숙한 대상이었다.
서예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78년 남편이 진흥건설 사우디지점장으로 나가면서 시간이 생긴 38세때였다. “중학교 2학년때 서예를 지도하는 꽃뜰 이미경 선생이 내가 쓴 글씨를 보고 ‘ 힘이 있고 글씨가 좋다’는 칭찬 한마디가 먼 훗날 막내딸이 네 살 때 붓을 다시 잡게 한 힘이 되었다”
그는 김중각 선생에게 한글서예를 사사했고 1984년 미국으로 이민 왔다. 남편과 함께 1983년~2000년까지 맨하탄 14가에서 옷가게를 했다. 세아이를 키우느라 일주일에 한번 가게 일을 도우는 한편 서예 스승을 찾았으나 당시 뉴욕에서 한글서예를 배울 곳이 마땅찮았다. 그래서 한문서예를 배웠다.
1984년 염진호 선생의 가정문제연구소 부설 서예교실, 1986년에는 미주한인서화협회에 입회하여 이웅용, 남현주, 이원식, 고영선 선생에게 사사한 것이다.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한문 5체를 모두 배우고 쓰면서 91년에는 이원식 스승으로부터 ‘노자’에서 나온 ‘오묘하고 깊은’ 의미가 담긴 현운(玄雲)이란 호도 받았다.
문인화는 김성민, 창남 하진담에게 사사했으며 지금도 한국을 방문할 때나 소헌 정도준, 일도 박영진 경기대 교수의 체본을 받아 사사 중이다. 7년동안 오정 안봉규 스승으로부터 동양화도 배웠다. “끊임없이 배운다”는 박원선은 노력한 만큼 상복도 많다.
1993년 뉴욕한인회 주최 광복절 기념 휘호대회 최우수상, 2003년 한국문화대전 최우수상(뉴욕 주지사상), 2001년 한국문화예술협회 초대작가(한국문화미술대전, 국제문화미술대전, 아세아미술초대전), 2001년 맨하탄 글릴리 갤러리에서 서화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깊고 넓은 서예와 서화의 세계를 넘나들며 생활 속에의 서예를 널리 알리는 한편 후학 양성에도 더욱 힘쓰겠다는 박원선은 ‘서예는 단순한 문자 전달이 아닌 정신’ 임을 강조한다. 습자지와 먹, 붓 모든 재료를 한국에서 수입해 와 미국 속에 우리 정신을 알리니 그야말로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보여주는 셈이다.
박원선은 배윤석씨와 슬하에 1남2녀를 두었고 장녀는 하버드 대학원을 나와 현재 보스턴에서 정신신경과 의사, 아들은 엔지니어, 막내딸은 하버드 대학원을 나와 롱아일랜드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손자손녀 6명을 둔 다복한 할머니로 인생도 단아하게 살아온 박원선은 ‘평생 외조해주고 지금도 서화협회 이사로 도움을 주는 남편이 고맙다’고 전한다. 그와 ‘차 한잔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새벽의 은은한 고요함 속에 망망한 흰 대지위로 뻗어나가는 선, 끊길 듯 이어지는 붓놀림이 남긴 명품 글씨가 눈에 선해왔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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