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웃 도우려 시작한 통역, 은퇴 후에도 할 수 있어 매력”
법정에서 영어가 서투르면 낭패 보기 십상이다. 조금이라도 잘못 알아듣는다면 큰 불이익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벽한 영어로 꼭 도움을 받아야 하는 곳이 법정이다. 언어소통이 힘든 이민자들에게는 법정통역사가 꼭 필요한 이유다. 영어가 서툰 한인들을 위해 20여 년 동안 법정통역사로 활동하는 70대 한인이 있다. 그는 바로 뉴저지 법원에서 프리랜서 한국어 법정통역사로 활동하는 김영철(76) 통역사이다.
통역은 나의 천직
그는 1938년 황해도 신천서 3남5녀의 8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8.15 광복 후 서울로 내려 왔다. 서울 고등학교 8회 졸업생인 그는 1960년 노스캐롤라이나로 유학길에 올라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했다. 대학생활을 마친 1963년 뉴저지 모리스타운에 본부를 두고 있던 LI 캐미컬에 취직을 하면서 뉴저지에 둥지를 틀게 됐다.
그 때부터 그에게 통역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같은 동네에 사는 한인들이 학교, 병원 등을 다닐 때 영어가 불편함을 해결해 주는 자원봉사 역할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아이의 전학이나 특수프로그램 등에 관한 상담을 할 때 통역을 했다. 한인학부모들의 학교문제나 학부모 컨퍼런스 통역은 거의 그의 몫이었다.
학교통역을 해주다보니 한인들이 병원 갈 때나 병원에서 한인 환자의 통역이 필요할 때도 그를 찾았다. 그는 어느 날 병원에 통역을 하러 갔을 때 병실에 들어가자마자 벽을 바라보고 눈을 감고는 귀에 들리는 소리만 통역하라고 했던 생생한 기억을 아직도 떠 올렸다. 한인여성 환자 보호차원의 세심한 배려를 한 병원과 한인환자를 도와준 보람 때문이다. 그렇게 동네에서 통역 봉사를 하던 그는 1990대 중반 병원의 요청으로 첫 법정 통역을 하게 됐다. 그 당시는 법정통역사 자격증 시험이 없어, 바로 법정에서 통역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2000년대 초 새로 생긴 자격증 시험을 치렀다. 하루 종일 세미나를 듣고 영어 시험도 통과해 정식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는 언어가 서툰 한인도 도울 수 있고 은퇴 후 용돈(?)도 스스로 벌어 쓰기 위해 은퇴 이후인 현재까지 프리랜서 법정 통역사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역 한인들을 도와 통역을 하다 보니 은퇴 후 법정통역사 일도 하고 있다. 아마도 통역이 나의 천직이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법정에서 만난 한인들
그는 법정통역사로 활동을 하다 보니 뉴저지 동네법정의 구치소는 물론 카운티 감옥에도 안 가본 곳이 없다. 통역을 하러 가는 일이지만 그곳을 드나들 때는 기분이 찜찜할 때가 많다고. 그래서 한인들은 미국에 온 이민자라는 손님의 입장에서 법을 잘 지키며 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법정에서 조언을 하지 못하고 단지 통역만 하기 때문에 억울한 입장의 한인들을 통역할 때는 도움을 주지 못해 안타깝고 아쉬울 때가 많다고 한다. 그에게는 한인을 도와주려다 핀잔(?)을 들어야 했던 아픈 기억도 있다. 매춘 한인 여성들을 통역할 때의 일이다. 그들 중에 교육을 받은 여성이 있기에 재판 후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느냐 다른 직업을 찾으라고 조언했더니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냐?’며 도리어 화를 내더란다.
그는 통역하다보면 단순교통위반에서 형사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인과 그들의 사연을 접한다. 그 중에서도 암이 걸려 병을 치료하느냐고 일을 못해서 몇 달치 집세가 밀린 한인을 주인이 쫓아내려고 소송을 제기해서 결국 집에서 나가라고 결정된 판결을 통역했던 일이 언제나 가슴속에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그가 법정서 만난 한인들 중에는 법정문화도 모르면서 외국변호사를 선임했는데 통역이 왜 필요하냐고 자기말만 하는 고집불통, 뚜렷한 증거도 없으면서 말로만 죄가 없다며 큰소리치는 자칭 정의파, 변호사 질문에만 답하고 검사나 판사에게는 거짓이라며 소리를 지르거나 심지어 욕을 하며 난동을 부리는 꼴불견 등등도 있었다고.
그는 ‘꼴불견 행태를 보이는 한인들을 통역하게 되면 겉으로 표현 할 수는 없지만 창피해서 얼굴을 들기가 민망스러울 정도“라며 ”그래도 언어와 문화적인 차이에 서툰 언어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한인들을 도와줄 때는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법정 증언은 꼭 할 말만
그는 법정에서 미국 사람들의 진술은 ‘예, 아니오,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등 4가지로 간략하게 답변하는 것과 달리 한인들은 무조건 설명을 하려다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법정에서의 증언은 매우 중요하며 그 증언에 대해 꼭 책임져야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쓸데없는 얘기를 늘어놓다가 낭패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보다 더 심각한 경우는 재판에서 쉬운 대답을 어설픈 영어로 하는 한인들이다. 한국어와 영어의 언어적 특징으로 종종 ‘예’ 또는 ‘아니요’의 대답이 상반되는 경우가 있는데도 통역도 전에 ‘예’와 ‘아니요’를 거꾸로 대답하는 한인들이 너무 많기 때문. 이럴 때 통역사가 증인이 잘못 대답할 걸아니까 ‘아니요’라고 말한 것을 ‘예’로 통역해주면 한국어를 모르는 판사나 상대방 변호사가 의심하는 것 같은 기운을 느끼곤 한다고.
그는 ‘법정통역사는 증인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최선을 다하여 정확하게 옮기는 것이 의무다. 따라서 통역관이 임의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며 ”법정증언은 간략하게, 영어를 조금 알아도 상대방의 질문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뒤 한 번 더 생각하고 천천히 대답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한다.
이럴 땐 너무 힘들어요.
그는 법정통역을 하면서 한인들의 언어표현으로 인해 당황스러울 때가 자주 있다고 한다. 한인들의 증언을 그대로 옮길 수 없는 말이 너무 많은 것이다.
우선 한인들은 우리 집사람, 우리 남편 등 단수, 복수 표현이 애매한 것, 대화할 때 확실한 주어가 없고, 호칭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예를 들어 남편을 오빠나 아빠로 호칭하는 걸 그대로 통역하면 판사가 오빠나 아빠와 결혼했냐고 반문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남편을 바깥사람으로 부르면 직접 통역을 할 수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변호사의 요청으로 통역을 할 때가 있는데 자신의 필요에 의해 통역을 요청하고는 재판이 끝만 뒤에 ‘나 몰라라’하는 식으로 보수를 안 주고 질질 끌 때는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실제로 변호사들이 통역사 보수를 지불 안 해서 소액재판에 회부되는 사례도 왕왕 있다고 한다.
후회 없는 삶
그는 법정통역사는 법정에서 올바른 진행절차를 알려주고, 최선을 다해 정성껏 책임의식을 갖고 통역을 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때문에 통역사가 되려면 남을 도와줄 수 있는 봉사정신을 갖춰야 하고 한국어와 영어를 잘하는 것은 기본이며 고급영어뿐 아니라 길거리 영어도 다 잘해야 한다고 귀띔한다.
한 달 평균 12-15건 정도의 법정 통역을 하고 있다는 그는 어느 날은 하루에 2-3건이 몰리는 경우를 볼 때 한인 통역사들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법정에서 벌금 판결을 받은 한인 젊은이들을 만날 때는 벌금 낸 영수증에 다시 오지 말 것(never again)을 꼭 써주면서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오지 말라고 아버지 같은 마음을 전하고 있다.
76세의 노익장으로 은퇴 후에도 보람과 더불어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용돈도 벌어 쓸 수 있는 프리랜서 법정 통역사의 일을 계속하겠다는 그는 “아름답게, 인간답게, 떳떳하게, 부지런히, 즐거운 마음으로 살다보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며 “항상 꿈을 정해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 희망임을 잊지 말고 살라”고 권유한다.
법정에서 언어가 서툰 한인들을 도와주며 늘 좋은 판결을 기원하며 통역한다는 그는
76세의 나이로 아직도 주변의 언어가 서툰 한인들을 위해 각종 통역과 번역을 해 주고 있다는 그는 인터뷰를 “통역이나 번역이 필요한 한인들이 있으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로 마무리 했다.<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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