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명선<수필가>
고국에서는 낭만이 넘치는 가을맞이 축제 일정이 풍성 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억새꽃 축제, 국화꽃 축제, 가을꽃 축제, 코스모스 축제, 불꽃 축제 등을 SNS로 담아 보낸 사진들을 감상 하다가 빛바랜 사진첩을 꺼내 놓고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빳빳하게 풀 먹인 하얀 칼라에 양 갈래 머리를 촘촘히 땋아 내린 모습의 푸르던 여고시절이 오색의 가을빛을 머금고 화사하게 웃고 있다.
산도 물들고 꽃들도 다정하던 국화전시회가 한참 이던 덕수궁 안 뜰에서 혼자서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단체로 어깨를 포개며 사진사의 연출대로 조신하게 폼을 잡고 졸업 앨범을 찍던 날 이었던가. 여러 가지 형상으로 틀을 만들고 기묘하게 꺾기고 휘어져서 만들어낸 국화꽃의 형형색색 다양한 작품들이 놀랍고 신기할 뿐 이었다. 그 중에서도 토끼처럼 생긴 대한민국 지도는 여고 모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멋진 작품 이었다.
휘어지고 비틀려 고단해진 삶속에서도 무시로 새벽이슬 먹으며 오직 하나의 자신을 표현하기까지 아파하지 않고 인내와 침묵으로 견디어 온 진솔한 사연들을 다시 보는 사진첩에서 느껴 본다. 나는 다른 화려한 꽃들 보다 탐스럽고 고상한 국화꽃을 참 많이 좋아한다. 튀지 않으면서도 어떤 꽃하고도 어울림이 잘 되고 중심에 세워도 곁에 끼워 넣어도 항상 그 자리에서 적절하게 쓸모 있는 역할을 해 주기 때문에 가끔 꽃꽂이 할 때도 망설임 없이 국화를 선택한다. 고요한 듯 하면서도 쓸쓸해 보이고 때론 추운 겨울날 난로처럼 따뜻하게 품어 주는 국화는 향기도 은밀하게 가까이 다가가야만 내어 주는 고고한 매력도 있다. 내가 국화를 좋아 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그 시의 내면의 깊은 뜻을 알기 전 부터 외우기 쉬운 음절이 맘에 들어서 외웠고 그렇게 외운 뒤에는 쉽게 잊혀 지지 않았다. 성장기를 지나오며 일찍이 겪게 된 경제적 아픔과 어른들이 세상을 배반하고 진실이 외면당하는 모순을 깨닫게 될 즈음에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작은 시집이 커다란 위로가 되었을 때이기도 하다.
시의 이런 저런 해석으로 순전한 마음을 어지럽히지만 쓰인 글자 그대로 아직도 나는 그 시를 향한 첫사랑의 의리를 지키고 있다. 국화의 추억은 또 하나 있다. 그때 덕수궁 뜰에는 노란 은행잎들이 우리들의 발등까지 노랗게 물 들였고 우정 하나 은행잎 하나 시집에 끼워 넣으며 땅거미 내려앉는 고궁을 뒤로하고 삼삼오오 거리로 나섰다
바로 그때 뒷짐을 진 걸음걸이가 어색한 국어 선생님이 앞에 있는 빌딩을 바라보며 졸업하고 만나면 저 프라자 호텔에서 핑크레이디를 사 주시겠다고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신다. 시청을 마주 보는 호텔은 그 시절에 주변의 빌딩 보다 꽤나 높은 건물 이었다.그런데 이름이 하필 이면 "프라자"였을까 엉겁결에 듣게 된 단어는 어찌하여 여성의 속옷을 연상하게 되었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처음 들어본 "핑크레이디"의 뜻을 알아보고 난 뒤였다. 핑크빛이 나는 달콤한 칵테일인데 약혼식이나 여자에게 청혼을 할 때 로맨틱한 분위기에 마시는 음료수라고, 사교성 많고 농을 좋아 하는 사촌 오빠의 애매한 해석을 그대로 믿고 그 총각 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졸업을 하고 말았다.
선생님은 새봄에 결혼을 했고 그렇게 오해는 착각 속에 막을 내렸다. 시간은 순서대로 사라지고 다시 순서대로 찾아온다. 뜰의 노을을 삼킨 국화를 바라보며 내 손은 지금 기억을 쓰고 있다 시계를 빠져 나온 시간은 아직도 그 곳에 멈추어 그렇게 추억으로만 말 할 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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