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미국에서는 12월 20일 까지 공식적으로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영하를 넘나드는 수은주는 이미 겨울왕국을 향한 채비를 마친 듯 분주하다. 높고 푸르던 가을 하늘 아래 곱던 단풍들이 낙엽으로 뒹굴더니 이제는 거리 한켠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단풍 잔치까지 끝낸 나무들은 자신의 소임를 마친 듯 당당히 서있다.
쉬는 날 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2년이 조금 넘었다. 상담대학원에서 배운 것은 상담이론과 기술 뿐만 아니라 상담사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을 돌보며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 편견 없이 내담자를 대할 수 있는 ‘자기 돌봄(self-care)’의 중요함이다. 산을 오르는 일이 내게는 그런 ‘자기 돌봄’의 작업이다. 내담자들의 삶의 애환, 눈물, 아픔, 억울함, 슬픔, 상처들을 배낭처럼 지고 올라가 하늘과 맞닿은 높은 산 위에 던져 놓고 내려온다.
그러나 추위를 그리 즐겨하지 않는 탓에 겨울산엔 오른 기억은 별로 없다. ’추워서’라는 표면적인 이유 저변에는 ‘아름답던 낙엽이 지고난 후에 만나는 겨울나무의 쓸쓸함이 괜한 썰렁함과 상실감을 자극하면 어쩌지…’란 두려움이 컸던 것 같다.
지난 주는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 덕에 쉐난도우에 올랐다. 화려한 꽃의 향연도, 초록빛 신록의 싱그러움도, 영화 속 단풍의 황홀함도 없는 겨울산에 큰 기대 없이 올랐다. 그런데, 그 곳에는 겨울나무만이 빚어낼 수 있는 숨겨진 풍경들이 있었다.
여름 산행 때는 무성한 이파리에 가려졌던 따뜻한 햇살과 풍경들이 마른 나무숲 사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건너편 산 중턱에 방금 틀어 낸 이불솜처럼 폭신하게 깔린 구름바다. 멀리 겹겹이 보이는 산등성들의 실루엣. 그 위에 수묵화처럼 둘러쳐진 겨울나무 울타리. 올려다보니 빌딩처럼 높은 나무의 키를 가늠할 수 있었고, 마른 가지 사이에 견고히 얹혀진 새둥지도 볼 수 있었다. 낙엽이 떨이진 후에야 비로소 이 모든 풍경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올 때가 있다. 꽃처럼 화려한 희망을 꿈 꾸던 봄과 싱싱한 초록빛의 벅찬 여름을 다 지내고, 곱던 단풍마저 낙엽으로 떨구고 탐스런 열매까지 빼앗긴, 춥고 억울하고 쓸쓸한 겨울을 지내는 이들이 있다. ‘다시 봄이 오기는 할까’하고 절망하며, 춥고 외로운 인생의 겨울을 지내는 이들이 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남은 것은 쓸쓸한 마른 나무가지 뿐이라며 절망으로 주저 앉은 이들에게 겨울산의 깨달음을 나누고 싶다.
내게도 분명 인생의 겨울이 있었다. 둘러보니 아무도 없고,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라고 혼잣말을 되뇌이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겨울을 혼자 터벅터벅 걷던 시간.
이제 돌아보니 나를 성장시키고 인내하고 성숙하게 만든 시간은 인생의 겨울에 머물던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그 시간들은 지금 내가 내담자들을 만나서 느끼고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공감의 능력을 배운 학교였고, 나를 사랑하는 법과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얻은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지금 인생의 겨울을 지나고 있다면, 낙엽이 진 후에야 보이는 겨울 풍경을 새로운 관점과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있음 좋겠다.
따뜻함이 그리운 계절이다. 추운날 간이역에서 먹던 뜨끈한 우동,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찜통에서 방금 꺼낸 왕만두, 어린시절 스케이트장에서 호호 불며 먹던 오뎅 국물이 그리운 계절이다. 이미 삶의 겨울을 지낸 이들이 있다면 지금 겨울산을 걷고 있는 가족들, 친구들, 지인들에게 ‘여기서 묵묵히 당신을 응원합니다’라는 따스한 격려의 메세지를 띄워보자. 누군가의 따뜻한 눈길이, 한마디의 위로와 작은 배려가 큰 지지와 응원이 됨을 인생의 겨울에 배웠다.
춥고 쓸쓸한 겨울에 만난 마른 나무가지의 교훈.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생각할 그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음을 겨울산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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