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나코스티아 향토 박물관 Smithsonian Anacostia Community Museum
야구 전시실에 가니 한가하게 동네 아줌마들이 누비(Quilt)를 하고 있다(위). 프러머 가족이 세운 교회(아래 왼쪽). 노예 출신이라도 같이 이웃으로 살았다.
박물관에서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바느질 교실을 연다니…
골방 같은 박물관
스미소니언박물관을 탐방하느라고 안내 책자를 보니 아나코스티아 향토박물관(Anacostia Community Museum)이라는 곳이 있다. 장소도 스미소니언박물관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한참 떨어진 DC South East(SE)구역에 있다. 별로 가볼만한 곳도 못 되는 곳 같아서 바쁜 황휘섭 사진작가에게 같이 가자고 할 생각이 나지 않아서 나의 집사람하고 둘이서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갔다.
GPS가 아니라 구글에서 위치를 적어서 찾았는데 꽤나 헤맸다. 덕분에 흑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구경은 많이 했다. 드디어 건물 입구에 섰다. 그저 한 동네 교회 정도 크기이었는데 문 앞에 흑인 얼굴 형상에 작은 조각품, 그리고 문 입구에 조그마한 장식이 아니면 비록 향토 박물관이라고 해도 알아보기가 쉽지 않은 건물이었다.
건물에 들어서니 구조가 방 두개와 좁은 골방 같은 곳 하나가 상설 전시장이고 큰 홀 하나는 특별 전시를 몇 달씩 이어 나가는 형식이었다. 남북전쟁 전후에 워싱턴, 특히 사우스 이스트가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보여주는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곳 이웃 할머니 이야기로는 몇 달간은 아프리카 구슬(African Beads) 전시회가 있었고, 또 누비(Quilt) 전시회가 있었다고 한다.
방 두개 반이란 것에 설명을 해야겠다. 방 하나는 프러머(Plummer)라는 개인의 역사방이라야 할 것 같고, 또 하나는 유명한 흑인 프로 야구선수의 사진과 유니폼 등이 진열된 방이다. 그리고 반이라고 지칭한 것은 조그마한 골방 같은 곳인데 1차 세계대전 시절에 이 동네에 탄약 공장이 있었는데 폭발 사고로 여러 명이 사망을 한 모양이다. 골방 가운데에는 성모 마리아 모습의 실제 인물 크기의 조각, 그리고 사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정말 골방 같은 작은 방이었다.
행크 아론의 사진이
프러머 방에 들어섰다. 정식 이름은 ‘Adam Francis Plummer’이다. 특징적인 것은 그가 꽤나 열심히 또 오랫동안 쓴 일기의 원본이 전시되어 있었고, 그는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로 팔려간 딸을 사온 것(?)과, 그 딸이 나중에 ‘깊은 늪에서 탈출(Out of Depth)’ 정도라고 이름을 붙일 책을 발간한 것과 그곳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블레든스버그(Bladensburg)에 성바울 침례교회를 설립했는데 지금도 현존해 있다며 사진까지 벽에 걸려 있었다.
다음 야구선수 방에 들어섰는데 가운데에 둥그런 회의실 탁자가 있고, 흑인 할머니 둘이서 바느질을 하고 있다. 무엇하냐고 물으니 한 시간 후에 이곳에서 취미활동으로 누비(Quilt) 강습이 있다고 한다. 박물관 전시장에서 동네 할머니가 모여 바느질 교실을 연다니….
야구의 Hall of Fame의 개념이라고 하겠으나 아주 초라했다. 벽에 걸려있는 전설의 흑인 야구선수, 베이비 루스의 홈런 기록을 깨트린 조용하면서 흑인이라는 멸시 속에서 자기의 몸값을 의연하게 보여준 행크 아론의 사진이 좀 이름값도 못 받는구나 생각했다.
워싱턴에 1960년까지 워싱턴 세네터스라는 야구팀이 있었다. 당시 팀 성적은 별로인데 유독 뉴욕 양키스한테는 잘해서 뉴욕 양키스 킬러라는 스포츠 소식을 한국에서 간간이 들었고, 이 팀이 밀워키로 갔다가 지금 추신수 선수가 속한 텍사스 레인저스이라는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인데, 그때 선수의 사진이 꽤나 많았다. 나는 잘 알지 못함으로 그냥 건성으로 보고 이방에서 나왔다.
남북전쟁기 DC 인구는 7만5천명
큰 홀에서는 남북전쟁 시기에 워싱턴을 주제로 한 특별 프로이었는데 박물관이라기에는 전시물이 거의 없었고, 사진전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허지만 나는 그 시대상을 공부했고, 꽤나 흥미로웠다. 기억에 남을만한 것들을 소개한다.
남북전쟁 이전에는 워싱턴에는 인구가 수천 명 정도이었다. 그리고 당시는 조지타운이 하나의 독립된 카운티이었다. 그러다가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흑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특히 이 아나코스티아 부근 사우스 이스트에 몰려들었다.
1860년에는 총인구가 7만5천명이고 흑인이 1만4천명이었는데 10년 후 1870년에는 인구가 13만1천명이고, 흑인이 4만3천으로 급격히 늘었다 하는 설명이 있는가 하면, 첫 흑인교회를 지은 하워드라는 사람과 교회 사진, 남북 전쟁시 취사병으로 18달러의 월급을 받은 사람, 첫 흑인병사, 흑인 인권 옹호자, 존경받던 흑인 시민 등의 사진이 있는가 하면, 도망간 흑인 노예를 100달러 현상금을 걸고 찾는가 하면, 백인과 흑인노예가 이웃에서 사는 그림, 그리고 흑백의 군인들이 같이 섞여 있는 사진도 있었다.
스미소니언박물관 재단에서 뉴욕의 아메리칸 인디안 박물관이나, 쿠퍼 해윗 미술관 같은 것을 갖고 운영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이 아나코스티아 박물관을 왜, 소유하고 운영하는지 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남북전쟁 전후한 워싱턴에 관한 역사공부를 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이곳을 떠났다.
주소: 1901 Fort Place. SE Washington DC(Anacostia 지하철 정거장에서 가깝다)
개장시간: 오전 10시-오후 5시
전화: (202)633-4820
이영묵
미주 서울대 총동창회장 역임
워싱턴 문인회 회장 역임
한국 소설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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