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모습. 앞줄 왼쪽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이석 선생. 임정요인들과 함께한 조성환 선생(뒷줄 오른쪽서 2번째).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인 박동완 선생. 목포 3.1운동을 주도한 박상준 선생(시계반대방향)
나라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분연히 떨쳐 일어서 저항했던 사람들. 안락한 삶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걸었던 선각자들. 우리는 그들을 독립운동가라 부른다. 1945년 8월15일, 그토록 소망했던 해방이 되었지만 정의는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친일파들이 득세하며 옥고를 치르고 풍찬노숙하던 독립 운동가들은 다시 어두움 속으로 스며들어야 했다. 대한민국의 권력과 금력을 장악하고 떵떵거리는 친일파와 그 후손들의 권세에 떠밀린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가난을 대물림하면서 치욕의 세상을 곱씹어야 했다. 그네들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일부는 조국을 등지고 태평양을 건너기도 했다. 영광도, 이름도 없이 역사의 부름에 응했다 사라진 사람들. 국가보훈처의 자료를 기초로 워싱턴 지역에는 어떤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거주하는지를 알아보았다.
“영광도, 이름도 없이 고난의 길...
가난을 대물림했지만 자랑스러워”
1 김화영: 안동 만세운동
딸 김순향(글렌버니, MD)
김화영(1886. 8. 7~1968.12.24.) 선생은 1919년 3월 17일 경북 안동의 예안면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일본 경찰이 시위대를 잡아가자 김화영은 다시 시위를 일으켜 구금자 석방을 요구했고 무력제지 하려는 일경 3명을 포로로 잡아 시위대열의 앞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면서 만세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검거돼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 박상준: 목포 3.1운동
딸 박양자(티모니엄, MD)
제주 출신인 박상준 선생(1911. 9. 3~1986. 4.11)은 목포공립상업학교 4학년으로 재학중이던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대대적인 학생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목포에서 학생을 규합, 동맹휴교를 결행하며 시가행진하면서 시위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그 후 징역 10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4년 제주도 보훈청은 박상준 선생을 이달의 제주출신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3 박동완: 민족대표 33인
손녀 박재영(엘리컷시티 MD)
박동완 선생(1885.12.27 ~ 1941.2.23.)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서울 출신이며 감리교 정동제일교회의 전도사로 근무하는 한편 기독교신보사 서기로 전도와 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썼다.
3.1운동 당시 기독교계 민족대표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후에는 하와이에서 목회와 함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국내의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와 비밀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014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손녀인 박재영 씨는 “우리가 어떻게 해방이 됐는데 요즘 사람들은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면서 “광복절이 돼도 아무 생각 없이 만세만 불러서야 되겠느냐”고 요즘 세태에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
4 승치현: 대한독립단 활동
손자 승훈(엘리컷시티 MD)
승치현 선생(1883. 1.15 ~ 1920)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1독립운동 후에는 독립단에 가입, 집북(輯北)지단 검독(檢督)으로 활동하였으며, 1920년 일제의 주구인 최정규·엄두욱 등에게 체포되어 피살되었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앞의 박동완 선생의 손녀인 박재영 씨와는 부부지간으로 대를 이어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5 이봉근: 함흥만세운동
딸 이규련(콜롬비아 MD)
이봉근 선생은 3.1운동 당시 함흥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 시위 조직과정에서부터 참여했으며 특히 시위 참가자 가족에 대한 후원을 책임지며 시위를 독려했다. 일경에 체포돼 그해 10월 고등법원에서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2년 함흥시 영생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으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사직했으며 해방 후 조만식 선생의 조선민주당 함남 도당 부위원장으로 있다 47년 5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한국 정부는 이봉근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을 기려 2002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1970년 도미한 딸 이규련 씨는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왜정시대를 사셨던 아버지와 선열들의 꿋꿋한 애국정신을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규련 씨는 메릴랜드여선교협의회 초대와 2대 회장을 지냈다.
6 이수정: 통천 만세운동
딸 김은(볼티모어 MD)
이수정 선생(1887.11.15 ~ 1977.12.25.)은 강원 통천 출생으로 이곳에서 전개된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일경에 피체돼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 등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 선생은 그 후 민족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학교와 교회를 세워 무지한 국민들을 일깨우는데 주력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 선생의 딸인 김은(본명 이은연) 씨는 “아버지는 평생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에 종사하시느라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어머니가 사업을 해 자식들 교육을 시켰다”며 “훌륭한 부모 밑에서 성장할 수 있어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은 씨는 1969년 도미해 회계사로 메릴랜드 주 정부에서 30년간 봉직하다 은퇴했으며 현재는 무궁화 주간 메디컬 센터 대표를 맡고 있다.
7 조성환: 광복군 창설 주역
손녀 조은옥(스프링필드 VA)
조성환 선생(1875-1948)은 1906년 안창호,이동, 김구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다 북경으로 망명, 독립운동의 터전을 다지다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 일본 총리 계태랑(桂太郞)의 암살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1년간 유배되었다. 상해임정에 참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참모장을 지내다 홍범도,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군단 부총재에 선임되어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노령으로 들어가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다.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다 국무위원으로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며 광복군 창설의 기틀을 마련했다.
해방 후 임정요인들과 환국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 유도회 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하다가 서거하여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손녀인 조은옥 씨는 워싱턴가정상담소 이사장, 글로벌어린이재단 총회장을 역임했다.
8 최용하: 가평 만세운동
며느리 송복희(엘리컷시티 MD)
경기도 가평 출신인 최용하 선생(1970년 작고)은 3.1 만세운동에 참여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그의 형은 옥사하는 비극을 겪었다. 최 선생은 그 후 일경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망명했으며 해방이 되어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사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손자인 최광희 씨(메릴랜드 전 한인회장)는 “조부님의 독립운동으로 집안이 어려워져 공부도 간신히 할 정도로 힘든 생활을 한 것으로 들었다”며 “그러나 꿋꿋했던 선조들의 기백과 정신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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