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독립선언의 주역들. 가운데 줄 왼쪽 네 번째가 백관수 선생. 백순 박사가 아버지 백관수 선생이 쓴 2.8 독립선언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독립운동가 고 백관수 선생. 독립운동가 고 백관수 선생.(왼쪽부터)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만국 앞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 반만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실로 세계 최고 민족의 하나이다~.”
동아일보 강제 폐간 저항하다 옥고...제헌헌법 제정에 기여
옥중 시집 ‘동유록’
봄 시구에 가슴 찡해
선비정신 잃지말라는
생전말씀 귀에 생생
1919년 2월8일 오후 2시, 일본 동경의 조선기독교 청년회관 대강당에서 400여명의 조선 유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역사적인 ‘2·8선언’이 터져 나왔다. 20일 뒤 조선을 뒤흔든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2.8선언의 주역은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낭독한 전북 고창 출신의 유학생이자 조선청년독립단장 백관수(白寬洙)였다.
“아버지는 평소 온화하신 성품에 말씀이 별로 없으신 분이었어요. 그렇지만 옳은 것을 위해서는 타협하지 않는 신념이 강한 분이시기도 했습니다. 6.25가 일어나면서 납북당하셨는데 아직도 아버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독립운동가이었던 근촌(芹村) 백관수 선생의 둘째 아들인 백순 박사(전 연방 노동부 선임 경제학자)는 벌써 6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백순 박사는 근촌 선생이 50세가 되던 해 낳은 둘째 아들로 2남6녀 중의 여섯째다. 한양대 설립자인 고 김연준 박사가 그의 자형이다.
그는 “아버지는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선생과 어려서부터 죽마고우처럼 자라 평생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면서 “집안이 가난해 일본 유학도 뒤늦게 하게 됐다”고 말했다.
2.8독립선언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로부터 들은 일화가 있다.
“아버지의 하숙집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준비를 했답니다. 하루는 회합 중에 누가 문을 두드려 열어보니 일본인 집 주인이랍니다. 모두들 발각됐구나 하며 긴장하고 있는데 ‘학생들이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이거 먹고 하라’며 찹쌀떡과 빵을 건네고 가더랍니다. 아버지는 일본인 중에도 양심적인 분들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답니다.”
그는 2.8독립선언으로 투옥된 아버지가 옥중에서 쓴 한문시집인 ‘동유록’을 아직 보관하고 있다.
“봄기운은 어찌 이리 더딘가, 하는 시구가 있는데 감옥에 계신 아버지의 처지와 나라 잃은 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찡해집니다.”
1889년생인 백관수 선생은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에서 수학하면서 2.8 독립선언을 주도했다. 체포된 후 1년간 복역하였으며 귀국해 조선일보사 상무취체역 겸 영업국장을 지냈으며 신간회에 가담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 했다.
1937∼1940년 동아일보 사장을 지낼 때는 일제의 강제폐간에 맞서다가 한 달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이후에는 정계에 입문해 한국민주당(한민당) 총무를 지냈으며 1948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법제사법위원장 및 헌법 기초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헌법제정 및 정부수립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해방이 되자 백순 박사 가족들의 서울 원남동 집은 늘 민족지사들과 정치인들로 북적댔다. 한국 민주당 창당의 산실역할을 한 곳도 바로 그의 집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무렵 겪은 폭탄 투척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저녁에 이른 잠을 청하려는데 갑자기 꽝 하는 굉음과 함께 집안의 유리창이 다 부셔지는 난리가 났어요. 아버지께서 김성수, 김병로 선생 등과 저녁을 드시고 회합을 하던 중에 누가 밖에서 수류탄을 투척한 겁니다. 다행히 수류탄은 포도나무 넝쿨에 걸려 큰 사고는 모면했습니다. 그 위태로운 소동 중에도 아버지는 유리조각을 털면서 유유히 안방으로 걸어들어 오셔서는 큰소리로 누군가에 호통을 치셨습니다. 선비의 품성에 담대한 독립운동가의 면모를 그때 저는 봤습니다.”
그가 아버지와 함께 산 세월은 불과 11년이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그의 부친은 납북되고 말았다.
“난리가 일어나자 저희 식구들은 먼저 시흥의 선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아버지는 뒤늦게 오시려다 강제 납북당하셨습니다.”
훗날 한 탈북자가 낸 책에서 그의 아버지가 이북에서 고초를 겪다 1961년 평양 근처에서 돌아가셨다는 내용을 봤다 한다. 그렇게 낯선 땅에서 한 독립운동가의 꿈과 뜻은 역사의 어두운 그늘 속에 묻혔다.
그는 1990년대 미 의약품 구호기관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의 독립운동가 묘역에 계신다는 아버지의 묘를 찾아보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해후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뚜렷한 소신과 민족의식을 갖고 한국 근대사의 격랑을 헤쳐 나아가시려 했습니다. 지금도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정직하고 신실한 선비정신을 잃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늘 귓가에 생생합니다. 통일이 되면 북녘 땅의 아버지를 다시 고향으로 모셔오는 게 저희 가족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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