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곡 윤길중은 우리 근세사에 품격 높은 정치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서예와 동양화의 대가로도 잘 알려진 분이다. 나는 운 좋게도 수년간 그 분의 비서실장(민정당 대표위원 보좌역 1급)을 맡아 모실 기회가 있었다. 그를 모시는 동안 어깨 너머로나마 서예와 동양화의 기초를 접근할 수 있었다.
청곡의 지론은 모든 작품마다 혼백이 깃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먹으로만 난을 치는데도 우아함이 느껴지고 각종 꽃으로부터는 현란한 색감을 감상하게 만들었다. 청곡은 스스로가 우리 역사의 서예 대가, 추사 김정희의 적통임을 자부했다. 추사의 가르침대로 서예는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혼이 실려나와 붓끝에서 작열하는 필법이어야 한다고 했다. ‘역주필첨’ ‘오지재력’ 즉 글을 쓰되 노트필기에 연필 쥐듯 세 손가락으로 잡지 말고 다섯 손가락에 골고루 힘이 가는 혼백의 고른 배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글이건 그림이건 진심을 바탕으로 한 영혼이 담겨야만 진품이라는 논리다.
서양의 저명화가들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을 감상하다가 보면 어느새 자신이 그림 속에 빠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유명한 반 고흐나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 등을 감상하노라면 기괴했던 그들의 사생활 추상은 사라지고 장본인들이 무엇을 절규했으며 차원 높은 영혼의 경지를 어떻게 표현하려 애썼는가에 동감하며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된다. 빛을 선호하여 작품을 그린 렘브란트나 너무 빛에 몰두하여 광선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캐내려고 몰두한 나머지 말년에는 눈까지 멀었다는 클로드 모네 등의 그림은 아름다움과 더불어 순수의 극치를 느끼게 만든다.
영혼에 심취하여 완성된 작품들은 감상자의 혼까지 유인하여 작품의 시도를 멋대로 상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달리나 샤갈 등은 자기들의 작품에 대한 질문에 내 그림의 내용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여러차례 술회한 적도 있다. 현실로 그리지 않고 영혼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추사 김정희의 필법과 일맥 상통하는 얘기다. 한차원 높은 정신적 경지에서 작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19세기에는 심지어 파리 몽마르뜨 술집에서 화가들이 모여 마약을 서로 권하는 것이 유행이었을 정도라고 하니 이들이 통상을 벗어나 새 차원의 정신세계의 묘사를 얼마나 갈구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세잔느나 뭉크나 우리나라의 단원 김홍도나 중국의 주관중이나 오랜 역사속의 솔거나 담징, 이중섭, 미켈란 젤로나 그림 유형으로 볼때 서로가 어울릴 수 없는 형태나 구상이지만 이들 모두의 지향점이 순수한 영혼의 세계를 찬미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였고 그래서 우리는 순수미학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웬 난데없는 가짜 미술작품이 우리 한국사회에 난리를 치고 있는건가. 몇해 전 박수근의 최고작 ‘빨래터’가 위작논란을 빚더니 다빈치의 모나리자로 꼽히는 천경자의 ‘미인도’도 가짜 소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또한 이우환의 작품 14개나 가짜 진짜 소동으로 수난 당하고 있다. 난데없는 가수 조영남의 10만원짜리 가짜 그림 소동은 또 뭔가.
민중봉기가 일어나도 모자랄 만큼 부패의 극점을 치닫고 있는 사회 상황의 반증인 것만 같아 알 수 없는 치욕감이 가슴을 때린다. 렘브란트의 대작 중 공간 한부분에 그의 제자들의 손길이 닿았다는 설로 얘기꺼리가 되었다거나 미켈란젤로의 대성당 천장 성화를 체력적으로 힘들어 제자들이 도와주었을 것이라는 추측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도 작금의 한국 미술계와 같은 사건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근 본인이 펄펄 뛰며 자신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데도 외부인들이 아니라고 하는 신도 모를 이 기현상, 돈 10만원에 가짜 작품을 몇십장을 그렸다고 진위를 수사하고 있는 이 참혹한 미술계의 현실을 보는 무덤덤 무표정한 국민들의 수준 낮은 반응 또한 참 밥맛 떨어지는 기분이다.
한 뼘 남아있는 우리의 정신적 청정세계에 그 지독한 부정부패의 구정물이 끼얹어진 것만 같다. 순수가 더럽혀진 세상은 마귀들의 세상이다. 뭔가 불행의 하한선을 넘어, 갈 때까지 다 간 것만 같은 초조감을 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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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자유광장 상임대표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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