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대륙회의 열리다
1775년 5월 제2회 대륙회의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몇몇 정치인의 명성은 전 식민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존 애덤스는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의 비밀회의도 이처럼 우수한 인물을 망라할 수는 없을 거라고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의 품격과 사상은 전성기의 영국 의회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제1회 대륙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시 만났고 신임 대표도 일부 참석했다. 두 애덤스와 버지니아의 리, 존 핸콕, 워싱턴, 제퍼슨 그리고 큰 키에 갈대 같이 마르고 잿빛 혈색에다 표정이 우울한 존 디킨슨 등이 눈에 띄었다. 펜실베이니아의 대표로는 자유파의 프랭클린, 소수파의 로버트 모리스가 있었다.
이때까지 대다수 미국인은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신민이었고 마음속으로는 본국과의 완전한 단절을 원해도 그것을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제 투쟁이 내란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이 시점에 양쪽 진영에서 과격파가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이제 미국인에게는 보수당 아니면 애국당(Patriots)이란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공정하고 권위 있는 역사가들은 당시 대륙회의 대표 중 3분의 1은 왕당파, 다른 3분의 1은 급진파, 나머지 3분의 1이 중립파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믿고 있다.
핸콕과 애덤스의 동상이몽
필라델피아에서의 회의는 행정상의 어려움을 겪으며 공연한 토론만 되풀이했다. 서로 시기하면서 경비 부담을 회피하려는 13개 식민지를 통솔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마침 필라델피아 의회는 총사령관을 선출하려던 참이었다. 총사령관은 각 식민지 연합군을 통솔해야 했기 때문에 대단히 어려운 위치였다. 당시 유력한 식민지는 제각각 지휘권이 자기 쪽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이렇다 할 근거도 없이 민병대령을 자칭하던 자신만만한 자유당원 존 핸콕이 후보자로 나섰다. 매사추세츠의 동료이자 대표인 존 애덤스는 그가 적임자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존 애덤스도 자신이 선출되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었기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군인이었다면! 나도 군인이 될 수 있을 거야. 요즘 군사 서적을 읽고 있으니까.”
화장실로 간 워싱턴
하지만 애덤스가 군인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서는 시일이 필요했고 그는 농장주와 상인을 통합하려면 버지니아 대표를 총사령관으로 선출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마침 여러모로 적당해 보이는 인물, 즉 조지 워싱턴이 있었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경험도 있고 재산과 가문에서 풍기는 인망은 물론 존경받을 만한 풍채를 겸비하고 있었다.
워싱턴은 군사적 지위를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회의에는 대령 군복을 입고 참석했다. 여기에는 과거의 군복무를 기념하거나 전쟁을 치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음을 표시하는 것 외에 아무런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그는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조용히 듣기만 할 뿐 별로 발언을 하지 않아 스스로 장군으로서의 현명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의 고결하고 장중한 풍모는 존경을 넘어 위압감마저 느끼게 했다.
워싱턴은 자기 이름이 들려오자마자 회의 장소에서 나와 도서실로 향했다. 이것은 그가 겸손한 동시에 상당히 노련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만장일치로 선출된 그의 짧은 취임인사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그는 “나는 내가 적임자라고 생각지 않지만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다짐한 뒤 “봉급은 실비 이상 받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사병 1천명 모집
이것은 정말 훌륭한 선택이었다. 사실 총사령관에 워싱턴만 한 적임자는 없었다. 그는 경륜, 결단성, 위엄을 겸비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또한 자신의 성격을 잘 알았고 완전한 자제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는 “나는 화를 내는 일이 없다”고 말했지만 단 하나 영국에 대한 분노만큼은 참지 못할 정도로 대단했다. 브래덕 장군과의 원정과 버지니아인에 대한 영국 군인들의 오만한 태도가 그에게 불쾌한 기억을 남겨놓은 탓에 최초의 충돌 이후 그는 반 反영국 진영에 뛰어든 것이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급진파가 아니었지만 버지니아의 신사로서 명예가 실추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다. 1747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1,000명의 사병을 모집해 내 돈으로 무장과 보급을 책임지며 선두에 서서 보스턴을 구원하기 위해 진격하겠다.”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는 동안 그는 치밀한 수완을 발휘했다. 한편으로 그에게는 젊은이, 카드놀이,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한다는 인간적인 약점도 있었다. 만일 이런 약점조차 없었다면 사람들은 그의 위엄에 눌려 감히 가까이 다가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사랑을 받은 한 부인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워싱턴은 가끔 아주 뻔뻔스런 짓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 그렇지, 너와 나는 그것을 참 좋아했지만.”
<
신용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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