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제퍼슨과 버의 대결
애덤스는 워싱턴과 마찬가지로 1800년 선거에서도 틀림없이 대통령으로 재선되리라 믿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다. 그는 자기 당의 지도자들과 분란을 일으켰고 해밀턴은 그를 배신자로 여기고 있었다.
연방당은 전국에서 인기를 잃어갔고 반대로 제퍼슨은 강력한 조직으로 여론을 지배했다. 연방당의 조직 분열이 어부지리 격으로 공화당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선거 결과 제퍼슨과 버가 똑같이 73표, 애덤스는 65표가 나왔다. 이런 경우 헌법은 의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규정했고 의회는 연방당이 지배하고 있었다. 버는 자기보다 연장자고 국민이 대통령이 되기를 원하는 유명한 선배를 위해 사퇴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아무튼 제퍼슨보다 버를 더 두려워하던 해밀턴의 영향력으로 결선투표에서 36표 차로 제퍼슨이 당선되었다. 이런 경쟁은 누구에게나 무의미하게 여겨졌기에 곧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를 따로 하는 조치를 취했다.
-제2의 아메리카 혁명
일부 역사가는 제퍼슨의 당선을 제 2의 아메리카 혁명이라고 부른다. 이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제퍼슨의 취임과 더불어 새로운 정치사상이 현실화한 것만은 사실이다.
워싱턴과 애덤스는 자유를 신봉했으나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반면 제퍼슨은 아메리카의 민중을 신뢰했다. 그는 개척지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의 사랑을 받아온’ 개척자이자 농민이던 부모 밑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그는 미합중국의 정치에 관해 세 가지 이념을 습득했고 이를 철저히 고수했다.
첫째, 지방 분권 정치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신념이다. 그는 주를 희생하면서 중앙정부를 강화하는 것은 일종의 위장된 군주주의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개입된 사소한 문제는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방대한 문제와 달라서 지방정부가 처리하는 편이 정확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굉장히 넓고 크기 때문에 하나의 정부가 모든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좋은 정부일지라도 관리들이 유권자와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민중에게 필요한 여러 문제를 소상하게 관리 및 감독할 수 없다. 또한 같은 사정으로 유권자가 정부를 감시할 수도 없으므로 관리의 부정, 부패, 재정 낭비 등을 조장하게 된다.”
-농민은 하나님의 선택한 사람들
둘째, 농촌문화가 도시문화보다 우수하다는 생각이다. 그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 있다면 바로 땅을 일구는 사람들이다. (…) 농민 대중이 도덕적으로 부패한 사례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들어본 일이 없다”라고 강조했다.
셋째, 헌법으로 규정한 대법원의 권한에 대한 불안이다. 그는 “내 커다란 걱정거리는 연방사법제도다. 이 기구는 지구의 인력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며 한 걸음씩 지반을 굳힌 뒤 그들을 지지하는 계급을 위해 음흉한 수법으로 정부를 삼켜버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국민이 가져야 할 영구적인 권한에서 빼앗은 권력은 무엇이든 부당한 찬탈이라고 판단했다.
-평민적이고 검소한 생활
신임 대통령은 전임자와 신조는 달랐으나 마찬가지로 교양 있고 온화했다. 18세기적 철학가이자 19세기적 정치가인 그는 정치가로서의 직책에다 철학가로서의 장점을 교묘히 가미했다. 가문, 풍채, 교양 등으로 보면 귀족적이었으나 때로는 게으름뱅이처럼 평민적이고 검소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편지를 쓸 때 유력한 사람이든 미천한 사람이든 표현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음을 아는 그는 보통 수완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공평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몹시 애썼다. 언뜻 그는 냉정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성품이 따뜻하고 열정적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인간의 정신에 가해지는 모든 학정에 끝까지 대항하겠다고 맹세했다.”
-버지니아대학 설계
그는 부유한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 거만한 사람을 신임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미천한 사람이나 농부와 노동자에게 애정을 느꼈다.
특이한 기계에 열중한 그의 취미 덕분에 몬티첼로의 저택에는 여러 종류의 기계가 가득 설치되어 있다. 집의 입구 천장에는 풍향계를 설치했고 평형추가 문을 여닫았으며, 도르래 장치로 술병이 지하창고에서 식탁까지 오도록 설계되었다. 여기에다 그는 미적 감각까지 뛰어나 매우 아름다운 몬티첼로의 저택을 직접 설계했다. 훗날 그는 곡선으로 처리한 벽돌 건물인 버지니아 대학을 설계했는데 이것은 아메리카에서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대중을 신뢰한다는 것을 대중이 본능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나 싶다. 인간성으로 볼 때 제퍼슨은 낙천적이고 애덤스는 비관적이었다. 이것이 아메리카 국민이 제퍼슨에게 투표한 이유였을 것이다.
<
신용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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