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글리시·음식·속담 파고든 우리말 책 잇따라 출간
김영란법 시행 이후 '더치페이'를 놓고 갑자기 국어순화 운동이 벌어졌다. 영어사전에 없는 국적불명의 외래어이고 네덜란드인에게 나쁜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는 '배려'까지 더해지며 더치페이는 '부끄러운 콩글리시'의 대표작으로 새삼 떠올랐다.
'한국 사람끼리 뜻만 잘 통하면 되지 외국인 심기까지 살펴야 하나? 태어나서 네덜란드인이라곤 본 적도 없는데…' 영어실력도, 국어사랑도 부족하다는 지탄을 받을까봐 이렇게 되묻지도 못한다. 그런데 콩글리시를 적극 변호하는 책이 한글날을 앞두고 나왔다.
신간 '콩글리시 찬가'는 일상에서 자주 쓰는 콩글리시 단어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뿌리를 찾아간다. 이 과정에서 각 언어들이 주고받은 문화적 영향도 자연스레 드러난다. 비교언어학을 전공한 저자 신견식씨는 영어·독일어·스웨덴어 등 15개 언어에 중세 영어·프랑스어 등 옛말까지 읽어 '언어 괴물'로 불린다.
영어의 '덴마크 페이스트리'를 덴마크에서는 '비엔나 빵'이라고 한다. 독일 사람들은 '코펜하겐 파이'라고 부르며 서로 기원을 주고받는다. 19세기 후반 덴마크에 온 오스트리아 제빵사들이 만든 빵이 시초라서 전부 일리 있는 말이다.
문제의 '더치페이'는 어떨까. 루마니아어·터키어·러시아어는 '독일식으로 내다'라는 표현을 쓴다. 칠레 스페인어에서 '영국식으로 내다'는 각자 내거나 먹고 튄다는 뜻이다. 이탈리아어에는 '로마식으로 돈을 내다'라는 표현이 있다. '각자내기'를 대신 쓰자는 쪽의 주장대로라면 독일인들이 가장 불쾌할 듯하다.
저자는 더치페이에 대해 "원래 한국어에서 큰 의미가 없던 더치의 원뜻은 더더욱 퇴색될 것"이라며 "해방 후 미국을 규범으로 삼은 한국의 서구화가 비교적 잘 반영된 콩글리시"라고 평가한다.
저자는 괜히 영어의 권위에 주눅 들어 콩글리시를 추방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어느 언어든 서로 접촉하다보면 조금씩 달라지기 마련이다. 한국인끼리는 자연스럽게 콩글리시를 쓰고 못 알아듣는 외국인에게는 친절히 설명해주면 된다는 얘기다.
게다가 한국에서 쓰는 한자어는 중국과 많이 다른데 중국과 똑같이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없다. 저자에게 콩글리시는 수많은 언어와 뿌리를 공유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문화유산"이다.
'닭도리탕'이냐 '닭볶음탕'이냐. 우리말을 둘러싼 또다른 논쟁이다. 우선 '도리'는 '새'를 뜻하는 일본어이기 때문에 순화해야 하다는 입장이 있다. 그런데 '도리'를 '새'의 의미를 집어넣었다면 '닭새탕'이 되는데 조금 어색하다. 순화한 이름도 닭을 볶았다는 건지, 탕으로 끓인 건지 모호하다.
'조리한 닭탕', '도려낸 닭탕' 등 어원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상상력이 동원된다. 한성우 인하대 교수는 신간 '우리 음식의 언어'에서 '도리탕'이라는 이름의 음식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1920년대 책에 평양이나 개성 음식으로 '도리탕'(桃李湯)이 소개된다. 다만 복숭아와 자두를 뜻하는 '도리'가 음식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불명확하다.
저자는 이름에 일본어가 들어간 게 맞다고 하더라도 '닭도리탕'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면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국어 선생이나 정책 담당자가 끼어드는 게 없어도 그만이고 있으면 외려 번거로운 '계륵' 아니냐는 것이다.
방언 전문가인 한 교수는 밥부터 국·반찬·술·음료에 이르기까지 음식 이름에 담긴 역사, 한국·중국·일본의 역학관계를 풀어낸다. 라면은 우리말에서 극히 드물게 'ㄹ'로 시작되는 낱말이다. 라디오처럼 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외래어라는 증거다. 중국에서 일본을 거쳐 들어왔는데 세 나라 라면 모두 한자는 같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주로 서북 지역의 국수를, 일본인은 면발과 국물을 직접 따로 만들어낸 음식을 뜻한다.
570돌 한글날을 맞아 우리말 속담을 총정리한 책도 나왔다. 국어학을 전공한 김승용씨의 책 '우리말 절대지식: 천만년을 버텨갈 우리 속담의 품격'은 무려 3천 가지가 넘는 속담을 풀이한다. 비슷한 한자 성어와 오늘날 쓰이는 '현대속담'까지 사전 형식에 담았다.
'말로 온 동네 다 겪는다'는 말만 거창하고 번지르르함을 이르는 속담이지만 오늘날 '마음껏들 시키라며 난 짜장'이 더 익숙하다. '부모는 부처고 자식은 부쳐다', '회사 보고 입사해 상사 보고 퇴사한다', '호의가 아홉 번이면 호구로 안다', '청첩장은 고기 먹으며 준 것만 유효하다' 같은 표현도 각각 뜻이 통하는 옛 속담이 있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직접 찍은 사진 300여 장도 함께 실렸다. 집필에 10년을 쏟아부었다는 저자는 우리 속담이 자기계발서나 처세서 못지 않은 '삶의 방향타', '지혜가 압축된 파일'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속담에 관심을 갖고 빠져 살다 보니 세상일들이 모두 속담으로 풀리고 어느덧 어머니 당신처럼 '~하다더니'가 입에 붙었음을 깨닫는다."
콩글리시 찬가 = 뿌리와이파리. 340쪽. 1만5천원.
우리 음식의 언어 = 어크로스. 368쪽. 1만6천원.
우리말 절대지식 = 동아시아. 600쪽. 2만5천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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