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남부 60만 대 북부 250만명
서로 대립 중인 남부와 북부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았다. 북부의 인구는 2,200~2,300만 명이었고 남부에는 약 550만 명의 백인과 400만 명에 가까운 흑인 노예가 있었다. 전쟁에 참가한 인원에 대해서는 역사가에 따라 숫자가 다르다. 남부 출신의 역사가들은 남부동맹은 60만명, 연방 측은 250만 명을 전선에 동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토머스 리버모어 대령은 《남북전쟁의 병력 동원 및 사상자》라는 저서에서 종군 인원은 연방 측이 1,556,678명, 남부동맹 측이 1,082,119명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병적부에는 단기 징집, 등록 갱신 등으로 동일 병사가 중복 기록되는 경우도 있어서 인원 계산이 곤란했다고 한다. 물자, 철도, 은행예금 등으로 보면 북부가 남부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전쟁 초기에는 쌍방 모두 무기를 비롯한 군수물자 생산이 빈약했다. 처음 14개월간 연방정부는 국내에서 3만, 유럽에서 7만 6,000정에 달하는 소총을 구입했다.
남부와 북부는 서로 무기를 생산하는 주요 국가에 정보원과 대리인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수송 수단이 없으면 무기를 구입해도 허사였다. 이 점에서 많은 배와 단련된 선원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북부가 훨씬 유리했다.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물질적인 여건은 북부가 우세했다.
-남부의 지휘관들
남부의 병사들은 북부의 병사보다 여러 스포츠에 경험이 많았고 이는 군사 활동에서 일종의 예비 훈련이나 다름없었다. 농장주들은 우수한 명기수인 동시에 명사수였다.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로버트 리, 존스턴, 잭슨 등 몇몇 유능한 장교는 남부 출신으로 처음부터 동맹군의 탁월한 지휘관이 될 운명이었다.
북부의 핵심을 이루는 민병은 이렇다 할 훈련을 받지 못했다. 장교는 대부분 일반 시민이었고 우선 하급장교에 임명했다가 주지사가 높은 계급으로 승진시킨 것이었다. 그중 몇몇은 우수한 군인이 되었으나 실력을 보이는 데 많은 시일이 필요했다. 주아브, 튀르코 등 프랑스식 알제리 보병 연대를 본뜬 몇몇 보병연대는 규율 있는 행동보다 화려한 제복으로 유명했다.
연방군 사령관은 유명한 윙필드 스코트 장군이었는데 나이 든 그는 질병으로 기진맥진한 폐인에 가까웠다.
-3개월로 예상한 전쟁
그럴 만한 전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1861년 전쟁이 시작되자 많은 사람들이 며칠이면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링컨조차 3개월이란 기간을 예상하고 지원병을 7,000명밖에 소집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코트는 우수한 장군과 30만 명의 병사로 3년 안에 승리한다면 굉장한 성공이라고 말했고 그는 그만큼 현명한 군인이었다. 남부는 수비 태세를 유지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남부동맹은 연방정부에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평화롭게 살도록 해주면 그만일 뿐 그 이상 북부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북부는 공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부는 초기에 일시적인 우세를 보였으나 북부는 보다 강력한 전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문제는 남부의 자원이 언제까지 버티느냐, 북부가 자신의 자원을 활용하는 데 얼마나 시일이 걸리느냐’에 달려 있었다.
-북부의 전략목표
북부의 전략 목표는 무엇인가? 남부 전역을 정복하는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지방을 점령하는 데는 상당한 대군이 필요했다. 대군을 징집, 훈련, 보급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도 리치먼드를 점령하는 것은 어떨까? 리치먼드는 경계선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작전이 손쉬울 것 같았지만 바꿔 말하면 워싱턴의 조건도 똑같다고 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리치먼드 점령은 중요하긴 해도 수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것으로 남부의 항복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남부동맹의 진짜 급소는 수송로를 지배하는 몇몇 요지였다. 남부의 주들은 주요 농산물 생산이 빈약했기에 식량을 대부분 오하이오 강 이북의 여러 주에서 수입했고 남부의 원료용 농산물을 외국에 수출해 군수물자, 무기, 탄약, 의약품, 기타 공업제품을 수입했다. 서부와의 교통에는 세 개의 철도가 있었는데 이 철도는 각각 멤피스, 빅스버그, 뉴올리언스 지점에서 미시시피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 세 도시를 점령하면, 즉 오하이오 강과 미시시피 강 유역을 침공해 남부동맹을 양단하고 해양까지 봉쇄한다면 승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리치먼드를 치자!
하지만 북부는 훨씬 이후까지 이 작전을 착안하지 못했다. 1861년의 연방군 작전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신병을 징집해 훈련시킬 것, 워싱턴을 지키고 리치먼드를 점령할 것, 유력한 남부인이 다수 거주하는 켄터키 주와 미주리 주를 확보할 것, 무엇보다 남부의 항구를 봉쇄할 것 등이었다. 독립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군대 이동은 거리 관계와 보급 문제 때문에 육로보다 해로가 용이했다.
워싱턴에서는 벌써 3만 명의 지원병이 술렁거리며 “리치먼드를 치자!”고 외쳐댔다. 그들의 열망을 억제하기는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군 지휘관들은 훈련을 위한 유예기간을 요청했으나 정부는 여론에 휘말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훈련이 부족한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저쪽도 훈련이 부족하기는 우리와 마찬가지다.”
<
신용석 번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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