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11
▶ ■ 김형욱은 왜, 박정희에 반기 들었나
닉슨 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존 미첼이 1978년 3월21일 프레이저위에서 증언하고 있다.
본보는 코리아 게이트에 관한 안홍균 씨의 증언을 기획 시리즈로 연재한다. 안 씨는 이번 증언을 통해 코리아 게이트를 둘러싼 한미 간의 숨막혔던 긴장과 갈등의 역사적 시간들을 재구성할 예정이다. 또 그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동선, 김형욱, 김한조와 김상근, 손호영 등 코리아 게이트의 주역에 관한 숨은 스토리와 에피소드들도 소개한다.
-박 정권 치부 드러내
1978년 8월15일, 광복의 날에 축재와 관련 두 번째로 소환된 김형욱은 미 의회에서 진땀을 빼고 있었다. 프레이저 위원장은 김형욱이 도박으로 잃은 140만 불에 대해 추궁했고 총재산을 묻자 답변을 거부했다. 프레이저 위원장은 바로 경고사격을 날렸다.
“계속 답변을 거부하면 의회 모독죄로 처리될 수 있소.”
김종필과 걸프사와의 돈 거래, 지하철 도입 부정, 이후락과 그의 사위인 정화섭, 이후락과 밀월관계였던 기업인 선경, 그리고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지낸 김성곤, 피살당한 정인숙에 관한 질문도 나왔고 김형욱은 자신이 아는 부분을 설명했다. 박정희 정권의 예민한 치부들이 조금씩 실체를 드러냈다.
-“당신 치부의 비결 알고 싶소”
김형욱의 재산 청문회는 날선 공격과 두루뭉술한 답변으로 일관하다 종착역에 도달했다. 청문회 서두에 남다른 ‘촉’을 보여줬던, 야당인 공화당의 구드링 의원이 화룡점정의 일격을 가했다.
“당신과 나는 공직생활을 한 년수(年數)가 같소. 그런데 난 빚이 2만 불이나 있지만 당신은 치부를 했는데 그 비결을 알고 싶소.” 다분히 비꼬는 질문이었다.
“당신은 내가 사는 뉴저지 옆의 펜실베이니아 출신이오. 언제 만나 한잔 하면서 이야기 합시다.”
김형욱은 직답 대신에 사적으로 이야기 해주겠다고 돌려 말하며 곤경에서 벗어나려 했다.
청문회가 끝나자 구드링 의원은 의장석에 앉아 있던 프레이저 의원에게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그간 우리는 당신의 한미관계 조사에 협조해왔소. 잘 따라왔지만… 그런데 보시오. 당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증인이 사기꾼이오.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동안 쌓인 여러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다. 프레이저 의원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기만 했다. 프레이저 소위 안에서도 생각을 달리 하는 의원들이 있었던 것이다.
김형욱은 바로 퇴장했다. 나에게 작별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청문회에 불려와 곤욕을 치른 그의 얼굴에서 실의와 분노가 팽배해 있음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게 김형욱을 본 마지막이었다.
-40달러 쇼
내가 만난 김형욱은, 물론 전부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는 자기 재산의 실체가 알려지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그는 자신이 ‘가난뱅이’ 임을 타인들에게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이런 일화가 있다. 하루는 김형욱이 하원 윤리위 사무실에 보충 증언을 위해 찾았다. 존 N. 수석검찰관을 만난 후 일이 끝났는데도 돌아가지 않고 사무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 보여 내가 물었다.
“아니, 왜 안 가시지요?”
“의회서 증언을 하면 40달러가 나온다는데 그걸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거요.”
내가 “그럼 기다리지 마시고, 제가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내가 직접 받아가겠소”하고 대꾸했다.
한국 중정이 박동선을 컨트롤했다는 신문보도.
몇 시간을 기다려 그는 돈을 받아갔다. 40달러도 아쉽다는 걸 대외적으로 보여주려고 일종의 ‘쇼’를 한 것이다.
그의 개인 통역을 맡기도 했던 김재현 변호사가 말해준 대목도 흥미롭다. 청문회가 마무리 된 한참 후 뉴욕에 갈 일이 생겨 그를 만났다. 김형욱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그가 불평을 털어놓았다.
“김형욱이 그놈, 나한테 변호사비도 안 주더라. 짠 놈이야.”
나는 김형욱이 왜 그랬을까를 속으로 생각해봤다. “김재현이 너는 나 때문에 신문에 나고 유명해졌잖아.” 아마 김의 속셈은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상원 윤리위 청문회와 토사구팽
김형욱은 상원에도 불려갔다. 78년 7월10일, 그는 상원 윤리위 증언석에 앉았다. 러셀빌딩 지하 15B에서 열린 비공개 청문회였다. 3명의 한국 관계 조사 법무관들(전문위원)이 심문을 맡았고 내가 통역했다.
심문관들의 태도는 정중하고 겸손했다. 그러나 추궁 내용은 서릿발 같았다. 경고도 주었다.
“의회에서 허위 증언을 하면 외국인은 징역형에 추방까지 됩니다.”
박동선 사건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고 김은 “박은 KCIA에서 월급을 받는 정식 직원은 아니나 우리가 쓴 고용인”이라고 증언했다.
상원 윤리위에서도 김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김은 점점 불편해지는 심정을 감추려하지 않았다.
“코리아 게이트 조사라는 미국의 중요한 일에 성심껏 조사에 협력했소. 일신상의 불이익과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협조했는데 갑자기 내 사생활을 조사하고 나를 범죄인 취급을 하고 있소. 현재 내 심정은 팽 당한 사냥개와 같소.”
그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고사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나를 쳐다봤다. 설명을 해달라는 뜻이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겨우내 충성한 사냥개도 쓸모가 없어져 삶아 먹는다는 의미다.”
미 법무관들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멕시코로 도피 제안
김형욱의 심사가 복잡했나 보다. 그는 조사관들 앞에서 레온 트로츠키의 말로(末路)를 자신에 빗대기도 했다. “내 지금 심경은 멕시코서 망명 생활했던 레온 트로츠키와 같다.”
그는 왜 갑자기 트로츠키에 자신을 비유할까,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났다. 트로츠키는 스탈린과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후 1927년 국외로 추방됐고 1940년 멕시코에서 암살당했다. 그는 붉은 군대를 창설했고 영구혁명을 주창하다 비운의 삶을 마친 러시아의 혁명가였다.
김은 또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냈다. “만약 현재 여러분이 기도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나는 제3국, 멕시코 같은 나라로 나가 있을 용의가 있소.”
밑도 끝도 없이 던진 말이었다. “미국이 기도하는 것?” 조사관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김형욱이 왜 멕시코로 나가 있겠다고 하는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절대권력 박정희의 ‘충견’을 자처했던 김형욱이 왜 미국에 와서 갑자기 반(反) 박정희 정권의 기치를 내걸었는지 궁금해 한다. 트로츠키와 멕시코. 나는 그가 던진 아리송한 화법에서 그 답을 유추해본다.
-김형욱은 왜 반기를 들었나
그것을 자신을 토사구팽 시킨 박정희에 대한 복수심 차원만으로 보는 건 단선적 이해다. 그는 버림받은 자의 슬픔과 분노 위에 선, 전복의 정치학을 도모했다.
김형욱의 비극은 그가 코리아 게이트의 본질을 잘못 파악한 데 있다. 미 의회, 행정부, 언론이 제휴해 박 정권을 교체하는데 그 의도가 있다고 오판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중정 부장으로 있을 때 흔히 행한 당시의 한국형 권력행사의 모델이 미국에서도 작동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오인한 ‘미국의 기도’에 편승, 협조하기로 마음먹고 미 의회 증언에 나섰던 것으로 읽힌다.
그가 꿈꾼 불온한 전복의 시나리오 뒤에 다가올 미래는 그 자신의 것이었다. 그가 의회 증언에 나서며 미국의 기도에 협조하는 만큼 언젠가 박 정권이 무너지면 금의환향할 수 있을 것이라 계산했을 것이다.
김형욱이 나중에 화를 자초한 원인은 그가 한국 최고 권력의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했고 그래서 자신의 임명권자와의 위치 설정을 잘못 한 것이 아니었나, 나는 생각해본다.
그는 권력의 핵심에 너무 오래 있었다. KCIA 부장 6년간 대통령의 못지않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자신도 최고 권좌에 오르지 못할 법이 없다는 자만심이 그를 채웠다고 본다. 더군다나 5.16 군사정변의 주역으로 직접 정권을 교체한 경험을 가진 그였다.
박정희 정권 레짐 체인지의 상상력을 암시라도 하듯 김형욱은 의회 증언 도중에 여러 차례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이 내 활동의 목표”라며 박정희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했다. 미국의 파워에 의해 한국의 지배 권력이 교체되면 자신이 필요할 것이란 주도면밀한 계산이었다.
첫 프레이저 청문회를 마치고 그가 내게 한 말이 생각난다.
“안 동지. 당신은 외무장관 감이야.”
마치 자신이 대통령이라도 될 듯 나를 추켜세웠다. 김재현 변호사에 대해서도 한마디 잊지 않았다. “당신은 법무장관 감이야.”
<
정리 이종국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