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 17
▶ ■김한조와 미 의회의 ‘5인 전위대’
김한조의 주선으로 핀들리 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신직수 중정부장의 축하연이 1974년 조선호텔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양두원 중정 차장보, 이호 전 법무장관, 황산덕 법무장관, 김한조씨, 정일권 국회의장, 민복기 대법원장, 라스뮤센 핀들리대 학장(총장), 신직수 부장.
-외환은행의 곤욕
문제는 40만 불이었다. 김한조가 KCIA로부터 받은 총 60만 달러 중 20만 달러는 사용처가 드러났지만 나머지 40만 달러의 행방을 증명해야 했다.
윤리위의 추궁이 계속되자 김한조의 변호사는 증거물이라며 서울의 외환은행에 40만 달러를 예치했다는 내용의 서류를 제출했다. 외환은행에서 발행한 것이었다.
“뇌물 자금으로 한국에서 받은 현금을 다시 한국에 입금시켰다?”
미국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증거였다. 더군다나 당시 외환거래는 중앙정보부가 면밀히 감시하던 시절이었다.
윤리위에서는 김한조 측에 외환은행의 입금 증명서가 아니라 이자 지출에 관한 내용까지 포함된 모든 입금 관련 서류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그것은 증거물이라 내놓은 서류가 KCIA의 요구로 외환은행에서 만들어준 것으로 추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한조 측은 윤리위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의회도서관 조성윤의 답변
그러자 윤리위에서는 미국 은행법에 의해 운영되는 외환은행 뉴욕지점 간부들을 불러 하원 의사당의 옆방에서 대면했다. 뉴욕 지점 간부들은 비싼 변호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났지만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곤욕을 치렀다. 뉴욕 지점뿐만 아니라 서울의 외환은행 본점도 뭐가 뭔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한국의 외환은행에서 답변이 왔다.
“은행은 고객의 비밀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 고객 관련 서류들을 제출하려면 미국 소환장이 아니라 한국 법원의 소환장이 있어야 한다.”
미국 법이 아니라 한국 법에 의해서만 관련 서류 제출이 가능하다는 외환은행 측의 답변에 하원 윤리위는 법적 돌파구를 찾았다. 그럴 때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의회도서관의 법률부 극동 담당관이 한국계다. 그에게 한국 법에 관해 자문을 구해보는 게 어떻겠느냐?”
그는 조지타운대 로스쿨 법학박사인 조성윤 과장였다. 플린트 위원장이 그에게 요청서를 보내 한국 외환은행 측의 답변내용에 대한 법적 유권해석을 부탁했다. 얼마 후 조 과장으로부터 권위 있는 법 이론에 기초한 장편의 답변이 왔다. “한국은 미국 측의 요청에 응할 의무가 있다.”
-김한조의 영어실력
1978년 5월 윤리위에 소환된 김은 코너에 몰렸고 계속 묵비권을 행사했다. 김한조는 미국에 유학 와서 핀들리 대를 다니고 아메리칸 대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쳤다고 하는데 갑자기 ‘세련되지 않은’ 영어를 쏟아냈다.
검찰관들의 추궁이 이어지자 그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Why only Korean!”
왜 한국 사람만 괴롭히느냐는 항변이었다. 그는 이어 “이스라엘도 로비를 하는데 왜 우리만 조사하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주제와 관련 없는 발언을 했지만 플린트 위원장은 제지하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김의 발언이 끝나자 플린트는 “어떤 나라든 부정한 일이 있다고 믿으면 당신이 증거를 제출해 달라. 우리는 지체없이 조사하겠다”고 응수했다. 김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김한조는 그의 자서전 ‘코리아 게이트’에서 자신이 호통을 치자 미국 측 인사들이 당황했다고 썼다. 견강부회(牽強附會)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걸 본 담당 검찰관인 탐 F.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김한조의 상원 최후진술
김한조는 상원 윤리위원회에도 비공개로 소환돼 증언했다. 1978년 5월12일 상원 러셀 빌딩 15-B실에서였다.
의장인 스티븐스 상원의원은 김한조에게 워싱턴 연방지방법원의 명령, 즉 김한조는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은 거절할 수 있다는 이유로 증언을 거부할 수 없음을 상기시켰다. 또한 위증을 제외한 김의 상원 증언 내용은 법정에서 김한조에게 불리하게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한조는 몇 명의 상원의원을 우연히 소개받은 정도로 알 뿐이며 돈을 제공한 일이 없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최후 진술을 자청했다.
“나를 모함하는 유일한 인물은, 외교 특권을 가진, 두 가지 이름을 쓰는 김상근이다. 그가 내게 불법 범죄행위를 저질렀다고 선언해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김상근의 본명을 폭로했다. 유일하게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는 김상근에 대한 일종의 ‘증오의 표현’이었다.
-“이건 뜨거운 돈이다”
김상근의 증언에 따르면 김한조는 KCIA로부터 받은 60만 달러 외에 자기 돈 10만 달러를 더해 미 의원들에게 나눠졌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건 뜨거운 돈이다. 받은 다음 날 다 줬다. 딸 셋을 한꺼번에 시집보내는 애비처럼 한 번에 돈을 썼다.”
상원은 물론 하원에서도 검찰관들은 김한조가 미 의원들에게 금품을 제공했는지 여부를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하원 윤리위의 자체 조사와 김상근의 증언을 통해 김한조의 의회 로비와 관련된 흥미로운 내막도 폭로됐다.
이른바 ‘5인 전위대’ 스토리였다. 전위대(前衛隊, Advance Guard, 불어로는 Avant Guard)는 사상이나 예술, 유행 등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을 뜻하지만 김한조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하원의원 5명에게 전위대란 이름을 붙였다.
김한조의 ‘전위대’는 테니슨 가이어(Tennyson Guyer, 오하이오), 가이 밴더 잭(Guy Vander Jagt, 미시건), 벤자민 길맨(Benjamin Gilman, 뉴욕), 래리 윈(Larry Winn, 캔사스), 로버트 라고마시노(Robert Lagomarsino, 캘리포니아) 의원이었다.
모두 공화당으로 하원 외교위원회 소속이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민주당에 반한파가 많은데 비해 공화당은 3선 개헌과 유신, 그리고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는 친한파들이 많은데 따른 것이다.
KCIA 요원인 김상근은 증언하면서 전위대 5명의 명단을 윤리위에 제출했다. 그 명단은 김한조가 서울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밝혔다. 아마도 가이어 의원을 제외한 4명은 김한조가 아니라 중앙정보부에서 대상을 지목해 끼워 넣은 것이 아닌가 한다.
-가이어 의원과 산수시 레스토랑
김상근이 ‘전위대’에 대해 증언하자 하원 윤리위는 김한조를 불러 신문했다. 금품 제공을 한 사실이 있느냐가 초점이었다.
“의원들에게 돈을 준 사실이 없다. 다만 가이어와 라고마시노 의원은 몇 번 만났으며 우리 집이나 산수시 레스토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한 적은 있다.”
산수시(San Souci)는 백악관 앞 16가에 위치한 고급 불란서 요리점이었다.
김한조와 가이어 의원의 인연은 불과 몇 해 전 시작됐다. 1973년 3월, 워싱턴 DC에서 핀들리대 기금모금 파티가 열렸고 이 모임에 참석한 김을 이 대학 학장(총장)이 가이어 의원에 소개해줬다. 가이어 의원은 핀들리대 출신으로 그의 부친은 이 대학 학장을 지냈다.
가이어 의원이 김한조와 가까워진 데는 그의 행정보좌관의 역할이 컸다. 핀들리대 이사이기도 한 그 보좌관은 김을 대부호로 대학 재정에 크게 기여할 인물로 생각했다.
그 후 가이어 의원은 부인과 함께 메릴랜드 랜함에 있는 김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김과 산수시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했으며 의회 식당에서도 자주 회동했다. 가이어 의원 등 외교위 의원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한조도 별도로 서울에 나타났다. 김한조는 김상근에게 방한 의원들을 위해 자기 돈 10만 불을 썼다고 강조했고 김상근은 서울에 그대로 보고했다. 유행가 가사처럼 ‘잘못된 만남’이었다.
<
정리 이종국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