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김웅수 2사단장(왼쪽 사진). 워싱턴에서 열린 장도영 전 육군참모총장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웃고 있는 김웅수 박사(왼쪽).
그가 하늘로 돌아갔다. 귀천(歸天)의 부음을 들은 건 일요일 아침이었다. 셰넌도어의 약수터로 향하던 길 위에서다. 시간의 파괴력이 주는 속수무책의 쓸쓸함이 길옆 마른 잎새들처럼 내 안에서 버석거렸다. 몇 년 전, 그는 생의 마지막을 모국의 딸에게 의탁하기 위해 떠났다. 그리고 자신을 낳은 한국에서 노쇠와 죽음을 맞았다.
-만주 독립군 마을서 성장
향년 95세. 짧지 않은 그의 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요약하면 그는 군인이자 학자였다. 그래서 호칭이 늘 난감했다. 그를 만날 때 ‘장군님’이라 하다가 어떨 때는 ‘교수님’이라 불렀다.
장군과 교수.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그의 곡절 많은 삶이 응축돼 있다. 그는 1923년 외가인 경북 김천 지례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가인 조부가 만주로 도피한 후 그의 부친은 고향인 충남 논산을 떠나 만주로 이주했다. 그가 강보에 싸인 한 살 때였다.
그의 핏줄에 새겨진 역마는, 그의 시대의 운명이 쳐놓은 빠져나가기 힘든 그물이었다. 독립군 마을에서 자란 그는 하얼빈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뤼순의 고등학교로 옮겼다. 1944년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이듬해 일본의 센다이 육군 예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했다. 해방이 되자 육사 생도대장을 거쳐 제1야전군 창설을 위한 사령관 대리 겸 참모장을 지내며 건군에 앞장섰다.
-박정희 소장과 5.16
6.25 동란이 발발하자 2사단장으로 공산세력을 막아낸 그는 전후 육군 작전국장을 지냈다. 이어 6군단장이던 1961년 5월, 그는 박정희 소장과 현대사를 가르는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인다. 그날의 고뇌를 담담하게 토로하던 그가 생각난다.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 장군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선 공산혁명이 아닌가를 의심했어요. 나는 국가 전복세력과 서울을 향한 공산군의 진격로 사이에서 원칙과 편법, 합법과 불법, 쿠데타 군에 가담된 부하 장병들의 장래 그리고 국가에 대한 내 책임과 나의 장래에 대해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는 전 군단에 비상명령을 내렸고 예하 8사단은 쿠데타 진압을 위해 출동했다. 그러나 흔들리던 상부의 지휘체계로 인해 진압에 실패하고 결국 쿠데타 세력에 체포됐다. 미국도 그랬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그는 군사정변의 소식을 듣고 남로당 출신인 박정희 장군의 전력을 떠올렸다. 공산혁명을 의심한 것이다.
5.16은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 원죄 같은 것이었다. “나는 5.16으로 인해 정치인뿐 아니라 많은 학자 종교인 학생 노동자들의 희생과 고생 앞에 군사 쿠데타를 방지 못한 군의 고급 지휘관의 한사람으로서 항상 죄의식을 느끼고 살아왔습니다.”
-가톨릭대 교수 시절
반혁명혐의로 수감된 그는 이듬해 자의반 타의반 도미하게 된다. 미국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는 어깨 위의 별을 스스로 떼 내고 학업을 택했다. 시애틀의 워싱턴대에서 경제학 학사, 석사를 마치고 72년 워싱턴 D.C.의 가톨릭 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초인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반 유신 민주화 시위로 귀국길을 접은 그는 가톨릭 대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 93년 은퇴했다. 패자로 41년을 역사의 무대 뒤편에서 은거해 있던 그는 2002년 메릴랜드 자택에서 기자와 대면했다. 박정희를 미워하느냐는 짓궂은 물음에 그는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긴 눈으로 볼 때 어려운 시련을 겪었지만 난 복된 사람입니다. 5.16이 없었으면 승승장구, 백성들의 어려움을 몰랐을 수도 있었어요. 친구나 동료들이 정권을 움직일 때 난 미국서 대학 1학년부터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생업까지 맡아 고난의 인생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됐습니다. 5.16때 내가 취한 동작이 국민을 위해 옳은 행위임이 언젠가는 증명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고 그래서 군사정권에 가담을 안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 장군에게 감사해야 하지요.”
그는 개인적 미움과 원한은 버렸다고 했다. 하지만 “훗날 누가 옳은가를 증명하기 위해 자기 변신에 온 힘을 쏟았다”던 그의 말에서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는 박정희 장군과 역사적 대결을 계속 해온 것이었다.
-완성된 인격체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했던 그는 한 인간으로서도 완성된 인격체를 구현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젊어서는 물론 팔순의 나이에도 꼿꼿한 풍모를 잃지 않고 스스로에게 충실했다. 늘 검소했고 겸허했으며 아랫사람들에게도 하대를 하지 않았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으려 했다.
학자로서는 재미 교수, 지식인들로 구성된 국제 한국학회를 이끌었고 한인 2세들을 인재로 양성하기 위해 한미장학재단 창설에 앞장섰다.
신앙생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와싱턴한인교회 장로로 봉직하며 노구에 화장실 청소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으로 떠나기 전인 2010년, 그의 전 재산인 25만 불을 하나님에게 헌납했다. 그의 유지는 지금 시니어들을 위해 쓰이고 있다.
가정사도 다복했다. 앞서 작고한 부인 박실모 여사와 슬하에 미영, 용원, 용회, 용균 등 1녀 3남을 두었다. 며느리는 이경신 워싱턴한인심포니오케스트라 단장이다. 모두 사회의 건실한 재목이 됐다.
-그가 남긴 말
일본 제국주의와 6.25 전쟁, 그리고 군사정변, 불혹의 나이에 시작한 미국에서의 국외자 생활…. 그의 풍운아적 역마는 이제 멈췄지만 자신에 정직하고 정의로움으로 자신의 시대를 채우려 했던 그의 삶은 풍요로웠다. 그리고 문무(文武)의 드문 합일체(合一體)를 이뤘다.
“원칙과 정도를 걷는다는 것은 힘들고 단기적으로는 외로운 길이겠으나 긴 눈으로는 외롭지 아니한 길이다. 그것은 정도를 걷고 있는 대중에게 소망과 인내를 주며 자기 인생에게는 고귀한 자위가 된다. 권력은 우리의 현 생활을 좌우시키지만 세상은 외로우나 정도를 걷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25일 영면한 김웅수(金雄洙) 박사. 그가 남긴 말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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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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