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항이 예상됐던 북미 정상회담이 거센 풍랑을 만났다. 미국의 강경파 즉 ‘매파’가 북한에 대해 ‘완전한 비핵화 일괄 타결’을 골자로 하는 리비아식 핵 폐기를 압박하자 북한은 이에 강력 반발하면서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북한이 겨냥하는 인사는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대북 강경파이다. 강경파들이 ‘선(先) 핵 포기, 후(後) 보상’과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남북 고위급 회담 중지와 북미 정상회담 재검토 카드로 배수진을 치고 있다. 이에 따라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예정인 북미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로드맵에 대해 어떤 합의가 도출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국과 북한은 15일(이하 한국시간) 낮 ‘남북 고위급 회담을 16일에 갖고 판문점 선언 이행 방안 등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이날 오전 9시쯤 고위급 회담을 갖자는 뜻을 우리 정부에 전했다. 하지만 북한은 16일 새벽 0시30분쯤 갑자기 우리 정부에 고위급 회담을 무기 연기하겠다는 통지문을 보냈다.

이어 북한은 오전 3시쯤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한국과 미국 공군의 대규모 연합공중훈련인 ‘맥스선더’(Max Thunder) 훈련을 비난하며 남북 고위급 회담을 중지하겠다고 밝혔다. 통신은 “미국도 조미(북미) 수뇌 상봉 운명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라며 북미 정상회담 재검토 카드도 꺼냈다.

통신은 또 “남조선 당국은 천하의 인간쓰레기들까지 국회 마당에 내세워 우리의 최고 존엄과 체제를 헐뜯고 판문점 선언을 비방 중상하는 놀음도 방치해놓고 있다”고 거론했다. 이는 최근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 공사가 국회에서 강연 행사 등을 갖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비판한 점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은 ‘맥스선더’ 훈련과 태영호 전 공사의 움직임에 불만을 표시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미국 매파의 움직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으로 보인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16일 발표한 담화를 통해 “일방적인 핵 포기만을 강요하려 든다면 다가오는 조미 수뇌회담에 응하겠는가를 재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부상은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를 비롯한 미국 고위 관리들이 ‘선 핵 포기 후 보상’ ‘리비아식 핵 포기’ ‘핵·미사일·생화학무기 완전 폐기’ 등을 주장하고 있는데 대해 “대화 상대방을 심히 자극하는 망발”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이 강수를 두자 청와대는 17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열고 남북 고위급 회담의 조속한 개최를 위해 북한과 협의해나가기로 하는 한편 북미 정상회담 중재를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미국은 ‘리비아 모델’ 대신에 ‘트럼프 모델’이란 새로운 용어를 제시하는 등 한발 물러서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북한의 반발 진화에 나섰다. 세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16일 ‘리비아 모델’이 미국의 공식 방침인지에 대해 “그것이 우리가 적용 중인 모델인지 알지 못한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모델’을 새 대안으로 제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이 여전히 유효한가’ 라는 기자의 질문에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이에 따라 백악관이 제시한 ‘트럼프 모델’에 국제사회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리비아 모델은 일괄 타결식 해법으로 북한이 먼저 신속하게 핵 폐기 절차를 마무리한 뒤 미국을 비롯한 관련국들이 보상과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것이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트럼프 모델은 일괄 타결과 ‘선 핵 포기 후 보상’을 골자로 하는 리비아 방식을 기본으로 하되 북한이 주장해온 단계별 동시적 조치를 가미하는 방안이 될 가능성이 높다”며 “큰 틀에서는 일괄타결을 하되, 단계별 비핵화 이행에 맞춰 제재 완화 및 보상 조치를 압축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서울지사=김광덕 뉴스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