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최초 하버드대 로스쿨 졸업… 첫 미국 한인 변호사
최초의 한인 연방 항소법원 판사… 후배들에 멋진 ‘롤 모델’
허버트 최(Herbert Young Cho Choy·사진) 판사는 한인들의 미국이민 116년의 역사에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 중의 하나다. 또 한인 이민 후손들에게 미국 주류사회 속에서 리더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교훈을 스스로의 삶을 통해서 가르쳐 준 인물이다. 불행히도 그가 한참 활동하던 1970년-80년대만 해도 한인들이 동포뉴스를 접할 수 있는 언론매체에의 접근이 쉽지 않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많은 한인들이 허버트 최 판사를 잘 알지 못한다.
-하와이 이민노동자의 후손
한인 이민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1903년부터 1905년 일본의 저지로 한국인의 미국이민이 중단될 때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허버트 최 판사는 초기 사탕수수밭 이민 노동자의 후손으로 1916년 1월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인으로는 최초로 하버드 법과대학원을 졸업하고 최초의 한인 변호사, 최초의 아시안계 연방판사, 최초의 하와이 출신 연방판사, 현재까지 유일무이한 한인 하와이 검찰총장, 최초의 한인 연방항소법원 판사를 지낸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의 삶은 지금도 한인 이민 후예들에게 우리도 이 땅에서 주류사회의 당당한 리더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준다. 또 그의 삶은 어떤 것이 그런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길이인가를 시사해 준다. 그는 환경적인 어려움이나 문화 사회적 제약과 타협하지 않고 가치 있는 목적의 달성을 위해 과감히 도전하면서 필요한 교육을 이수했다.
-인종차별 극심한 1938년 하버드 로스쿨 진학
2004년 3월, 88세로 생을 마친 최 판사의 별세에 맞추어 당시 최종고 서울법대 교수가 한국법률신문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최 판사는 14세 때까지 하루 12.5센트의 임금을 받으며 파인애플 가공공장에서 일을 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도서관에서 일을 했다. 그 후 양복점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후원으로 공부를 시작해 1938년 하와이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법과대학원에 진학했다. 그의 아버지는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아들에게 의사가 되기를 권했으나 그는 법을 공부하는 것이 남을 더 크게 돕는 길이라 믿고 법과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최 판사가 하버드 법과대학원에 진학한 1938년은 미국에서 공공시설의 이용, 교육, 고용 등에서 인종차별을 금하는 인권법(Civil Rights Act)이 통과된 1964년보다 사반세기나 앞서서였다. 인권법이 통과된 후에도 남부에서는 흑인들의 대학출석이 저지되는 등 심한 인종차별이 계속되었고 드디어는 1968년 민권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로까지 이어졌다.
이런 미국에서의 인종차별의 역사를 돌아볼 때 그가 1938년 22세의 나이로 하와이를 떠나 5,000마일 밖의 본토 보스턴으로 유학을 간다는 것은 대단한 각오와 결심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음 한편으로는 당시 성장하고 있던 아버지의 양복점 사업을 도우면서 부모형제가 있는 하와이에서의 편안한 삶을 선택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또 주민의 다수가 아시안계이나 아시안계 사람들과 외모가 비슷한 하와이 원주민들이라 인종차별 같은 것은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하와이를 떠나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1971년 연방 항소법원 판사 지명
최 판사는 1941년 법과대학원을 졸업하고 하와이 방위군과 미 육군에서 법무관으로 복무했다. 1946년 하와이로 돌아와 1971년까지 변호사로 활동했다. 1957년부터 1959년까지는 하와이 검찰총장을 역임했다.
1959년 하와이가 미국 통치령에서 50번째 주로 승격되면서 최 판사와 함께 로펌을 설립하고 파트너로 일하던 중국계 이민 2세인 희람 퐁(Hiram Fong)이 하와이 주 첫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하버드 법과대학원 선배이기도 했던 퐁 의원의 추천으로 최 판사는 1971년 닉슨 대통령에 의해서 하와이를 포함하는 서부지역 제9 항소법원 판사로 지명되었고 바로 상원의 인준을 거쳐 판사로 취임했다.
당시 55세였던 그는 1984년까지 13년 동안 현직 판사로, 그리고 2004년 타계할 때까지 20년 동안 원로판사로 총 33년간 제9 항소법원에 재직하면서 수많은 판결을 내렸다. 특히 그는 미국 인디언들의 토지와 어업권에 관심을 갖고 인디언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2004년 3월 19일자 미주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최 판사는 작고한 부친의 빛바랜 재단사 자격증을 판사임명장과 함께 사무실에 나란히 걸어뒀었고, 사무실을 찾는 손님들에게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인 법조인들에 모델 돼
2010년 최 판사에 이어 두 번째로 한인 연방판사가 된 루시 고 캘리포니아 북부지방법원 판사는 2013년 4월 샌프란시스코 한국교육원이 한인 고교생들을 위해 마련한 특강에서 자기는 대학에 가기 전까지 동양인이 주류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갈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나 최 판사를 만난 것이 큰 동기가 됐었다고 말했다고 2013년 4월 19일 모 한인 신문이 보도했다.
최근 워싱턴 지역 출신인 마이클 박과 케네스 리 변호사가 한인 연방 항소법원 판사가 연이어 임명되는 기쁜 뉴스를 접하면서 최 판사가 이들을 포함한 많은 한인 법조인들에게 롤모델로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또 앞으로도 많은 한인 후손들이 최 판사의 삶이 보여준 교훈을 거울삼아 법조계 뿐 아니라 다른 여러 분야에서 성공하는 리더가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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