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단 나이 46세, 첫 시집을 내기까지 7년. 모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정작 이정훈 시인은 “더 일찍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서재훈 기자]
201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정훈 시인은 46세라는 나이, 20년차 화물 트레일러 운전사라는 이력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이후 시인의 이름은 잊혀졌다. 그런 이 시인이 최근 시집 ‘쏘가리, 호랑이’(창비)를 내놨다. 7년 전 등단작을 제목으로 내건, 7년만의 첫 시집이다. 5년 전 한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려다 출판사 내부 사정으로 어그러졌다. 그러다 창비 박준 시인의 밝은 눈이 그를 찾아냈다.
우여곡절에도 얼굴은 밝았다. 17일 서울 서교동 창비 사옥에서 만난 이 시인은 되레 “한번 고꾸라진 다음이 가장 좋은 타이밍 같다”고 말했다. 등단도 그렇다. “더 일찍 등단했다면 철없이 전업시인을 꿈꿨을지도 몰라요. 첫 시집도 부끄러움을 알고 난 뒤에 나와 차라리 다행이다 싶어요.”
7년 전 등단 당시 나이와 직업만 화제가 된 건 아니다. 고 황현산 평론가 등 당시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은 ‘쏘가리, 호랑이’를 두고 “요즘 시단에서 보기 힘든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를 보여준다”고 극찬했다.
이번 시집은 7년 전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떠올리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 덩굴무늬 우수리범이 /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 들판을 걸어가면 구름무늬 조선표범이 /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쏘가리, 호랑이’ 일부)가는, 신화적 생동감이 넘실댄다.
이 시인이 부려놓는 신화의 원형질은 소 장사를 하던 할아버지, 전쟁에 나가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큰아버지, 불발 수류탄을 분해하다 손가락을 잃은 아버지, 그리고 그들이 살던 자연이다. “8살 때 서울에 왔어요. 시는 상실한 걸 쓰는 건데, 전 중간에 붕 뜬 상태에서 떠나 보낸 것들을 썼어요.”
‘중간에 붕 뜬 상태’는 지금도 비슷하다. 등단했던 7년 전처럼, 이 시인은 여전히 안성, 단양 일대 공장을 화물차로 오가고 있다. 변한 게 있다면 그 사이 평택ㆍ제천 고속도로가 뚫려 38번 국도를 타지 않는다는 것 정도다. 시는 휴게소나 공단 뒷길에서 트럭 운전대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쓴다. “다른 이유는 없고 차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가 있어서. 하하.”
길 위에서 시를 길어 올려서일까. 이 시인에겐 ‘고고한 밥벌이’에 대한 일종의 혐오가 있다. “대학 다닐 때 제일 싫었던 말이 ‘조동아리만 살아서’라는 거였어요. 육체 노동만이 인간을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졸업 뒤에도 힘 쓰는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 다짐했죠.” 그래서 화물차였을까. “원래는 포크레인을 몰려고 했는데, 트레일러 면허가 포크레인 면허보다 싸더라고요(웃음).”
그렇기에 그의 시에는 되레 노동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 황규관 평론가는 이를 두고 “시인의 노동수단은 아직 사회적 노동 현실과 내밀하게 연결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 시인은 “나는 삶에서 다 했다”고 되받았다. “제 시에 노동의 선명한 투쟁성이 보이지 않는다고들 해요. 그런데 노동시는 꼭 투쟁해야만 하나요.” 노동의 투쟁이란, 고고한 밥벌이들이 내세우는 관념적 알리바이 같은 건 아닐까.
그래서 그의 목표도 “우아하고 품위있는 노동시”를 쓰는 일이다. “학생 때 같이 운동했던 친구들 중에 정치인이 된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전 현장에서 여전히 노동을 하고 있잖아요.” “운동 말고 진짜 노동”을 하는 이의 자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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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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