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인경찰에 의해 흑인 음주운전자인 로드니킹의 무자비한 구타장면이 비디오로 공개되면서 흑인사회가 분노했다.

오렌지주스를 훔친 흑인소녀를 사살한 혐의로 마켓 주인 두순자씨는 기소돼 1991년 10월18일 유죄 평결을 받았다.

흑인강도 사살사건에 연루된 박태삼씨 운영 존스마켓앞에서 흑인들이 불매시위를 벌이고 있다.

폭동 이틀째인 4월30일 한인타운 버몬트와 3가 교차로의 샤핑몰이 폭도들의 방화로 거대한 화염에 휩싸여 있다.
4.29폭동은 백인경관의 로드니 킹 구타사건을 도화선으로 폭발했지만 사실은 소외받고 있는 계층의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모순이 불씨였다. 90년대 초반 남가주 지역은 국방산업의 퇴조로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흑인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지고 소외당했다. 1990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가주의 가족 연 평균수입은 3만5,798달러인 반면 사우스센트럴 LA의 가족 연평균 수입은 7,395달러였다. 가주의 빈곤율은 12.5%인 반면 사우스센트럴 지역은 32%로 3명 중 1명은 최저생활도 영위하는 못하는 극빈자들이었다.
흑인들은 또한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데다 오랫동안 차별을 당해왔다는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다. 로드니 킹 구타사건은 흑인들의 인간 존엄성이 여지없이 짓밟히는 것을 TV라는 영상매체로 실감나게 보여주었기에 흑인들은 어느 인종보다도 더 충격을 받았으며 4.29 폭동은 흑인 커뮤니티가 평소에 쌓인 불평불만을 한꺼번에 터뜨린 폭발행위였다. 폭동 이전에 이미 폭동을 예고하기라도 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지만 LA시당국, LA경찰국은 물론 커뮤니티 지도자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폭동을 막지 못한 것은 물론 LA시는 폭동 후유증으로 큰 진통을 겪었다.
1. 뉴욕의 청과상 애플사건
1990년 1월18일 뉴욕 브루클린 지역 처치 애비뉴에 있는 장봉재씨의 청과물 상점 레드애플에서 아이티계 흑인 여성 고객과 한인 점원사이에 1달러짜리 과일을 놓고 시비가 벌어졌다. 한인 점원은 흑인 여인이 과일을 훔쳤다고 주장했으며 흑인 여인은 한인 점원이 자기를 구타했다고 말했지만 ‘블랙워치’라는 흑인단체가 개입, 시위를 하면서 미 전국의 언론에서 이 사간을 다뤘다. 한인 가게 주인과 흑인 고객간 갈등이 한·흑 갈등으로 비화했다.
2. 로드니 킹 구타사건
1991년 3월3일 경찰단속에 걸린 로드니 킹(사진)이 정지명령을 무시하고 과속으로 달아나자 LAPD 소속 경찰관 4명이 킹을 체포후 무차별 집단구타한 사건이다. 가주 대배심원은 로드니 킹을 구타한 백인경찰관 4명을 기소했으나 92년4월29일 시미밸리에서 열린 재판에서 이들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흑인들이 LA와 일부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4.29폭동을 계기로 미국사회의 인종차별 문제가 세계적 관심사로 대두되자 연방검찰은 구타 경찰관 4명을 8월 연방법원에 기소했으며 LA연방법원은 93년 4월 구타경찰관 4명 중 2명 유죄, 2명 무죄 판결을 내렸다.
3. 두순자 사건
1991년 3월16일 사우스 LA지역의 엠파이어 마켓에서 주인 두순자씨가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사진)로부터 얼굴을 얻으맏으면서 다투던 끝에 두씨가 할린스를 총으로 쏘아 숨지게 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1.79달러에 불과한 오렌지 주스 한 병으로 희생자가 10대 소녀였다는 점에서 미 주류언론의 센세이셔널한 보도의 표적이 되었다. 엠파이어 마켓앞에서는 ‘브라더 후드 크루세이드’같은 흑인 과격단체가 한인상점을 상대로 불매운동을 촉구하는 등 흑인들의 시위가 연일 지속됐다.
두순자 여인이 흑인 소녀 할린스에세 총격을 가해 숨지게 한 것은 분명히 범법행위이며 인종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법의 심판에 맡겨야했다. 특히 두순자 피고인이 백인판사에 의해 5년 집행유예로 풀려나자 인종갈등으로 비화됐다. 이번에도 주류언론의 편파보도로 업주와 고객간의 갈등이 인종갈등으로 둔갑했다.
4. 박태삼 사건
사우스 LA의 한인운영 존스 마켓에서 주인 박태삼씨가 흑인강도를 사살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91년 6월4일이었다. 경찰과 검찰 모두 정당방위였음을 인정한 이 사건은 두씨사건과 맞물려 흑인이 피살됐다는 사실만이 부각되어 흑인시위의 또 하나의 빌미가 되었다.
한흑 커뮤니티 지도자들의 중재로 4개월만에 가게를 내놓은 박씨는 끝내 재기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두씨와 박씨 사건 등으로 한인이 가해자로 몰리던 91년 한해동안 흑인 강도에 의해 살해된 한인업주는 7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5. 한흑 기독연맹 결성
1991년 11월 박희민 목사 등 한인교계지도자와 세실 머레이 목사 등 흑인교계 지도자들이 양 커뮤니티의 인종화합을 위해 기독연맹을 결성하고 LA 시청에서 손에 손을 잡고 인종화합을 위한 행사를 개최했다. 그러나 한흑 기독연맹도 이미 깊어진 한흑갈등의 골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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