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가와 웨스턴 커피샵 유제성 씨

폭동 피해자 유제성씨는 “LA폭동은 자녀들에게도 큰 상처를 주었다”며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1992년 4.29폭동 당시 자신이 운영하던 커피샵이 불탄 자리에서 유제성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박흥률 기자]
삶의 터전 커피샵 화마에 잃고 어떻게 사나 막막
상처딛고 잘 자란 자녀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울뿐30년전 그날 폭도들이 몰고 온 화마에 자신의 업소가 불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유제성씨에게 4.29폭동은 온 가정의 ‘상처’이자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1976년 더 나은 삶을 위해 미국 땅을 밟은 뒤 16년간 쌓아왔던 아메리칸 드림의 공든 탑이 폭동으로 무한 순간에 무너졌을 때 그처럼 망연자실해 본적도 없다. 그 후로 30년뒤, 아직도 날의 충격이 생생한 현장에 유씨가 다시 섰다. 당시 폭도들의 방화로 전소됐던 LA한인타운 6가와 웨스턴 애비뉴 코너의 샤핑몰은 이름과 업종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한인타운 중심에서 한인업주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고 있는 현장 그대로이다.
1992년 4월29일 6가와 웨스턴의 현재 미스터 커피 자리에서 ‘PD 커피샵’을 운영하고 있었던 유제성씨는 사우스 LA지역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씨는 다음날 자신의 업소가 불에 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1992년 4월30일 그때 30대 후반이었죠. 이곳 상가에는 한인업소 10곳이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어요. 정오 무렵 웨스턴 남쪽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더니 상가 남쪽에 불이 붙더군요. 뭐 어떻게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유씨는 그날 오후 자신이 운영하던 커피샵이 잿더미가 되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다. 집기를 챙길 시간도 없었다. “방심하고 있는 사이 당했다”는 그는 시 당국의 행태를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난다. “소방차, 응급차가 한인타운에 있었어요. 우리 상가가 불나는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가더군요. 새까만 잿더미만 남은 가게를 보는 심정이 어땠겠어요?”
폭동이 잠잠해진뒤 보상은 제대로 이뤄졌을까? 유씨는 “SBA론은 가능했지만 제대로 된 보상은 받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4.29 폭동 직후 유명 정치인들이 LA한인타운을 찾았다.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도 LA한인타운을 방문해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한인사회가 정치력을 펼치기엔 힘이 없었다. 유씨 가게를 찾은 댄 퀘일 부통령의 부인은 “보험은 가입했냐”고 물었다. 유씨는 “불에 탄 가게를 본 한인들은 마음의 상처가 컸다”며 “주류 정치인들이 계산적으로 위로를 하던 모습에서 아쉬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유씨는 폭동 후 30년이 지났지만 잊지 못하는 정치인이 한 명 있다. 당시 한인 정치인 중 가장 먼저 폭동 현장을 찾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이 건넨 말은 지금도 힘이 된다고 유씨는 말했다. 유씨는 “주류 정치인들이 형식적인 위로였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진심이었다”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으니 낙담하지 말라는 위로에 따뜻한 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유제성씨는 현재 LA한인타운에서 ‘포니운전교통자학교’를 운영하면서 부동산 에이전트도 겸업하고 있다. 유씨는 폭동 당시 청소년기를 보낸 한인 1.5세, 2세를 생각하면 늘 미안함이 앞선다. 아빠, 엄마가게가 불에 타고 갑자기 무일푼이 된 가정의 몰락을 바라본 아이들에겐 ‘평생 상처’로 남았기 때문이다. 30년전 당시 초등학생이던 남매는 장성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도 했다. “4.29 폭동이 이제는 빛바랜 아픔이고 상처이지요. 하지만 당시 아이들 마음의 생채기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어요. 지난 30년간 눈부신 발전을 한 한인사회가 다시는 그런 아픔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한다”고 이야기하는 유씨의 표정에 결연함이 배어있었다. [박흥률 기자]
■ 크렌셔와 67가 리커 허 종 4.29 LA 기념재단 대표

4.29 폭동 당시 리커스토어를 운영하고 있었던 허종 4.29 LA 기념재단 대표가 4.29 폭동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전 한미식품상총연합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그는 재기해 다시 리커스토어를 운영하다 2년 전 은퇴했다.
사우스 LA 리커스토어운영… 약탈·전소 피해
한인 피해자·규모 알려진 것 보다 훨씬 많아“아직도 4월만되면 알 수 없는 우울감이 찾아옵니다”
한미식품상총연합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허종 4.29 LA 기념재단 대표는 1972년 20대 중반에 이민왔다. 20년간의 고된 이민생활 끝에 사우스 LA 크렌셔와 67가가 만나는 지점에서 알짜배기 리커스토어를 운영하게 되며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 아메리칸 드림이 무너지는 데는 몇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1992년 폭동 당시 주변 상황이 위험해지자 경고에 따라 가게 문을 닫고 다른 곳으로 몸을 피했다. 그날 저녁 7시경 폭도들이 가게를 덮쳤고 절도 피해 뿐 아니라 화재로 가게가 전소돼 버렸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이 찾아왔다.
허 대표는 “가져갈 수 있는 것 다 가져가고 불을 질렀다”면서 “불만 안 냈어도 같은 자리에서 다시 도전해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2~3개의 일을 해가며 재기에 도전했다. 특히 가발과 옷장사를 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 오랜 시간 뒤 사우스 패사디나 지역에 리커스토어를 다시 차리게 됐다. 그리고 20년간 운영하다 2년전 비로소 은퇴했다.
그는 “지역 주민과 주변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잿더미 위에 다시 사업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흑인 정치인과 흑인 단체들이 재영업 조건을 까다롭게 해 뜻을 이룰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4.29 폭동의 실제 상황이 알려진 것과 다른 점이 많다고 주장했다. 허 대표는 “한인 업주와 흑인 손님 간에 일부 갈등은 있었지만, 이는 손님과 업주의 문제이지 인종 간 갈등은 아니었다”며 “대부분의 업주는 흑인 손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문제는 한인과 흑인 인종 갈등으로 몰아가거나 그렇게 프레임을 씌운 일부 매체, 군중심리를 막지 못한 공권력 등에 있었다”고 지적했다.
피해자도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았다고 강조했다. 허 대표는 “당시 3,300여 군데 크고 작은 마켓, 리커스토어, 스왑밋 등이 피해를 당했다”면서 “나와 같이 화재 피해까지 입은 곳들도 적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피해자들 중 제대로 재기한 경우는 많지 않다고 그는 전했다. 허 대표는 “재기하지 못한 경우가 최소한 절반 이상”이라면서 “당시 폭동 피해로 사망한 경우, 경제적·정신적·신체적 피해로 인해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경우, 이혼한 경우, 거리로 나앉은 경우도 부지기수였다”고 말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녀들을 챙길 수 없어 피해가 자녀들에게도 되물림된 것도 문제라고 덧붙였다.
그는 4.29 폭동 피해자들의 재기가 쉽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도움을 받지 못했고 우리의 정치력이 약했기 때문으로 봤다.
허 대표는 “피해 복구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주는 정치인,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정치인은 없었다”며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한인 정치력 신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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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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