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전적 소설 ‘여자아이 기억’ 국내 출간, 욕망의 대상으로 추락했던 1958년 여름
▶ 혼란 속 주체성 회복을 위한 분투 그려…사적 기억을 보편적으로 풀어 공감 형성
“노벨상은 남성을 위한 제도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119명) 중 17번째 여성으로 이름을 올린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82). 여성의 삶을 통해 성과 계급 불평등을 풀어내 온 그는 시상식을 나흘 앞둔 지난 6일 한 언론 인터뷰에서도‘에르노답게’ 노벨상을 직격했다.
발언만큼 그의 문장도 거침없다. 윤리적으로 무결한‘품행’을 통해 페미니즘이란‘정의’를 증명하라는 흔한 요구를 보란듯이 넘어선 글이라 더 매력적이다. 욕망을 드러내고 가장 내밀한 감정인 수치심마저 치열하게 그린다. 자기연민은 거세됐다. 존재 그 자체로서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셈이다.
신간 ‘여자아이 기억’은 그런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한 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작품이다. 체험한 것을 쓰는, 사적 기억을 보편에 가닿게 만드는 자전적 소설이란 점에서 전작들과 통한다. 특히 이 책은 ‘에르노식 글쓰기’의 기원을 엿볼 수 있다. 작가가 글쓰기를 시작하게 만든 1958년의 사건을 다루고 있어서다. 번역을 맡은 소설가 백수린은 그 내용을 “대상으로 추락했던 여자아이가 주체의 자리를 회복해가는 과정”으로 표현했다.
사건은 1958년 열여덟 살 ‘여자아이’가 여름방학 캠프의 지도강사로 참여하면서 벌어진다. 캠프 사흘째 밤 스물두 살의 대표 지도강사 H와 밤을 함께 보낸 것. 지방의 가톨릭 학교에 다닌 그녀는 캠프 참여로 처음 부모의 감시망을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느끼지만, 한편으론 같은 일을 하는 남녀를 단순한 동료 관계로 이해할 준비조차 안 된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떠밀려가며 진행된 강압적 관계. H에게 그녀는 결코 사랑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모든 의지를 포기하고 그의 의지 속에 온전히 갇힌다”.
문제의 밤은 캠프 기간 6주 내내 ‘여자아이’를 뒤흔든다. H를 비롯한 동료 강사들에게서 온갖 수모와 굴욕을 당한다. 그럼에도 “공포도 수치심도 아니고, 그저 벌어지는 일에 대한 복종이자 벌어지는 일의 의미가 부재한 상태”였던 당시 그녀는 그 일을 자신이 다른 여자들 사이에서 “간택”되었다고 생각하고 진정한 사랑으로 합리화한다. 그것 외에는 달리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여자아이 기억’은 그 후 약 4년의 시간을 회고한다. 합리화 외에 다른 방법을 몰랐던 그녀는 철학 수업과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등을 만나면서 캠프 당시보다 더 깊이 추락한다. 욕망의 대상이 된 데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는 자책과 수치심이 그녀를 덮쳤다. 자유로운 주체로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휘청거리는 시간들. 폭식과 무월경, 스트레스의 신체화 증상을 보이고 도벽이 생긴다. (물론 당시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글쓰기라는 “안식처”에 다다르기까지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분투의 나날이 이어진다.
냉철한 분석과 담담한 문체는 보편성을 키운다. 화자인 ‘나’가 과거의 나를 ‘그녀’ 혹은 ‘1958년 여자아이’로 지칭함으로써 “나였던 그 여자아이를 해체하는” 분석은 더 예리해진다. 건조한 문장은, 독자가 자신을 투영할 감정적 여백을 준다. 여성으로서 겪은 어떤 경험들이 불현듯 스치고 묘한 공감을 한다. 물론 여성이 아니라도 “이해할 수 없으나 내게 강요된 타자의 법칙 앞에 압도되어 자신을 상실해 본 사람” 또 “그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주체가 되기 위해 분투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백수린 작가)이라면 위로를 받게 될 테다.
어쩌면 그것이 작가가 기대한 순간일지 모른다. 잊고 싶었던 그 수치심을 끝내 잊지 못하고, 20년 동안 수차례 펜을 꺾고 다시 쥐어가며 “이 책을 쓰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의지로 집필한 게 ‘여자아이 기억’이다. 그 바탕에는 책임감이 있다. (노벨상 수상 소감으로도 “책임”을 언급한 작가다.) 글쓰기로 1958년 여자아이를 “구출”하고 “그녀는 나고, 내가 바로 그녀”라고 한 작가는 자신의 책임을 다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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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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