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휴가철이어서가 아니라 서부 깊숙히 여행을 떠날 기회가 생겼다. 대자연을 바라볼 때 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문명은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이란 본래 원시로 돌아갈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곤한다. 자연 속을 여행하고 있으면 행복하지만 그 와중에도 세상은 시끄럽고 여기저기서 전쟁 소식이 가득하다. 인간은 왜 서로 상생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명예때문인 것 같다. 굴욕스럽게 생존하기 보다는 의(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명예를 내려놓고 비굴하게 남의 발 밑에 엎드려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은 인간. 그러기에 세상은 늘 상충된 이해와 가치관, 철학이 부딪히고 종교가 부딪히고 이슬람과 유대교, 기독교가 서로 싸우며 동양과 서양 중국과 미국이 서로를 헐뜯기에 바쁘다. 말없는 자연은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어머니의 품 속… 자연에서 배우기를 바라는 것만같다.
음악을 들으면서 배우는 또다른 하나가 바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음악은 그 스스로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으로 향하는 마음이 열려있다. ‘나만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베토벤의 말이다. 음악은 그 스스로 강요하지는 않지만 늘 향수가 서려있다. 그것은 드보르작의‘신세계 교향곡’이나 베토벤의‘전원 교향곡’처럼 문자 그대로의 자연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겠고 바흐의 음악처럼 어떤 종교적 경외감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늘 가고싶지만 도달할 수 없는 피안에 대한 그리움을 음악으로 대신해 왔다. 그러기에 전쟁을 좋아하며 반목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또한 음악을 사랑해온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며 그것도 파괴적인 문명을 지향해 온 서구에서 더욱 발전해온 것 또한 더더욱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서구는 동양을 동경해 왔지만 동양이 서구에 빚진 것은 체계적인 음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음악이 지향하는 바가 문명의 거인으로서의 서구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동양으로 향하는 소박한, 열린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서구는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자연에 대한 감사나 이해보다는 오직 정복과 진보… (그것이 기독교였든 사회주의 철학이었든) 파괴와 변화만 추구했지 자연이나 주위와의 화해와 친화력을 발휘한 적은 없었다. 오직 자연과의 화해… 유일한 동양적인 버전이 바로 음악이었다. 드보르작은 뉴욕 음악원 원장으로 임용되면서 신세계의 음악에 깜짝 놀랐다. 그것은 바로 인디언 민요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동양음악의 아름다움때문이었다. 세상에 많은 협주곡들이 존재하지만 아마도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만큼 인간에게 이러한 동양적인 멋드러짐을 선사한 작품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감사와 짙은 향수를 곁들였기에 더욱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게됐지만, 드보르작은 보헤미안의 시골에서 도축업을 하던 촌뜨기출신이었다. 이러한 드보르작이 음악계에 출현하자 가장 반긴 사람이 바로 브람스라는 신고전주의 작곡가였다. 브람스는 당시 리스트나 바그너 등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지나친 화려함과 영웅주의를 비관하고 있었는데 단순 소박 대신 지적인 허영심에 가득 차 있던 서구 낭만주의 물결에 투박한 시골냄새와 향수를 가득 실어나른 드보르작의 음악은 브람스에게는 청량음료나 다름없었다.
브람스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브헤미안의 투박한 바람을 실어나르던 드보르작은 미국 뉴욕 음악원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신세계의 음악에 빠져들게 되는데 자연의 소리라고나할까 동양적인 예지라고나할까, 향수를 느끼게 하는 많은 곡을 작곡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브람스는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을 듣고 인간으로서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다고 극찬했는데 브람스 또한 이와 쌍벽을 이루는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우리에게 깊은 향수를 전하고 있다. 이 곡들이 좋은 이유는 곡이 화려하고 아름답기 때문보다는 친구처럼 정답게 속삭여 주는 소박함이 있기 때문이다. 누가 들어도 어렵지 않고 물흐르듯 자연스러우며 서정미 측면에서도 매우 아름답다. 드보르작의 경우는 인디언 민요가 섞여서 인지 우리나라 농촌의 풍경이 떠오르는데 소모는 목동들의 풀피리 소리같다고나할까. 특히 해저무는 저녁 무렵에 울려퍼지는 드보르작의 음악은 괜시리 고향생각에 눈물젖게 만든다. 브람스의 음악은 알프스 목동의 정경이 전해져 오는데 고향은 달라도 향수가 전하는 모습은 일맥상통하고 있다. 다만 브람스의 협주곡은 베토벤이나 멘델스존 등 고전주의 명곡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지만 드보르작의 (첼로)협주곡은 보다 야심찬 곡상으로 가득하다. 보헤미안 기질이 가득했던 드보르작은 인디안 민요와 흑인 영가 등에 크게 감명받았지만 이를 결합하여 향수로 녹아내는데 있어서 드보르작의 수훈은 매우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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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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