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덫에 갇힌 독일차
▶ 폭스바겐, 직원용 소시지 만들다
▶ 노하우 쌓이자 1973년부터 판매
▶ 작년 855만개 팔려 차 판매 추월
‘벤츠 아레나’였던 베를린 경기장
미 우버에 네이밍 내주며 위기감
중 BYD 등 전기차 업체도 위협적
“독의 느려터진 공공부문이 문제 자율주행 등 전략 세우기 어려워 고급차 시장 방어가 현실적 대안”“우리는 자동차보다 소시지를 더 많이 생산한다.”
지난달 26일 독일 니더작센주 볼프스부르크(Wolfsburg) 소재 폭스바겐 본사에서 만난 현지 직원 옌 크룩스는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폭스바겐이 생산한 소시지가 역대 최대치인 855만2,000여 개나 팔리면서 폭스바겐 로고를 단 자동차(520만여 대) 판매량을 추월했다는 의미였다.
폭스바겐이 무슨 소시지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 회사의 소시지는 자동차와 그 역사를 같이한다. 독일어로 ‘늑대의 요새’를 뜻하는 볼프스부르크는 1937년 나치 정권이 ‘국민차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폭스바겐을 세우기 전까지 인구 1,000명 남짓한 농촌이었다. 허허벌판에 공장을 지었기에 폭스바겐은 주택, 도로 등 인프라를 만들어야 했다. 노동자들이 먹을 식량도 마찬가지였다. 자체 농장에서 키운 돼지로 소시지를 만들어 직원 식당에 공급했는데, 생산 노하우가 쌓이자 급기야 1973년부터 시중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소시지 판매량이 자동차를 뛰어넘는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볼프스부르크가 속한 니더작센주에서만 팔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기록이다.
▲ 동이 난 소시지 vs 침울한 자동차 도시실제 12만 인구의 절반 이상이 폭스바겐에 근무하는 볼프스부르크 주민들은 자동차만큼이나 소시지에 대한 자부심도 넘쳤다. 현지에 도착하면 가장 빨리 폭스바겐 소시지를 살 수 있다는 기차역 앞 기념품점은 오후 3시 전인데도 소시지가 동이 나 있었다. 매장 직원은 “소시지를 사려고 베를린에서 1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오는 고객들도 많다”며 ‘전국적으로 팔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으며 “그러지 않아도 잘 팔린다”고 웃었다.
그러나 소시지의 활약은 ‘세계 최대 자동차그룹’인 폭스바겐에는 굴욕적인 뉴스다. 차가 그만큼 팔리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 폭스바겐은 지난해 순이익이 전년 대비 30.6%나 감소하는 등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겪고 있다. ‘영원한 판매시장’으로 여겼던 중국에선 현지 자동차 업체가 빠른 속도로 추격하면서 판매량이 급감했고, 전기차로 전환이 늦은 데다 유럽 자동차 시장마저 침체기를 겪는 등 복합적 원인이 작용했다. 급기야 지난해 8월에는 창사 이래 최초로 독일 내 공장 2곳을 폐쇄하고 2035년까지 직원 3만5,000명을 감축하는 구조조정 계획까지 발표했다.
80년 넘게 볼프스부르크를 먹여 살린 폭스바겐이 휘청거리자 ‘아우토슈타트’(자동차도시)라 불리는 이 도시도 같이 흔들리고 있다. 폭스바겐이 내는 세금이 줄면서 볼프스부르크시는 예산 동결 조치를 취했고 어린이집과 도로 건설 등 일부 공공 프로젝트가 일시 중단됐다. 현지 언론은 집값 폭락을 우려해 부동산에 집을 매물로 내놓는 폭스바겐 직원들이 늘었다고 보도했다.
▲ “폭스바겐 입사하면 평생 걱정 안 했지만…”실제 1박2일 일정으로 찾은 볼프스부르크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 기준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의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폭스바겐 대표작 일명 ‘딱정벌레차’(비틀)를 설계한 페르디난트 포르쉐 이름을 딴 중심가 ‘포르쉐 거리’는 오후 6시가 넘었는데도 한산했고 문 닫은 식당도 여럿 보였다. ‘50% 세일’ 현수막을 내건 대형 의류매장도 한가했다.
크룩스는 “과거에는 폭스바겐에 입사하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안 했는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며 “그나마 지난해 말 노사 협상에서 공장폐쇄 계획을 접은 건 불행 중 다행”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인원 감축 계획은 그대로라 동료 중 일부는 이미 퇴직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다만 그는 “곧바로 해고되는 건 아니고 재취업을 위한 교육 시간을 준다”며 “독일에선 실업급여로 1년간 월급의 60%가 지급된다”고 했다.
한때 대표차 ‘골프’를 하도 많이 팔아 ‘골프스부르크’로도 불린 이 도시는 이제 까딱하다간 ‘소시지의 요새’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듯했다.
▲ 우버에 안방 내준 벤츠, ‘아우디 도시’도 적자위기는 폭스바겐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독일 자동차 산업이 전반적으로 침체되면서 아우디 본사가 있는 바이에른주 잉골슈타트는 올해 적자예산을 편성하고 긴축 재정에 나섰다. 시에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아우디 실적이 바닥을 쳤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까지만 해도 ‘벤츠 아레나’로 불렸던 베를린의 다목적 경기장이 ‘우버 아레나’로 바뀐 것도 위기의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경기장 측이 벤츠와의 네이밍 스폰서 계약(10년)을 종료하고 새 스폰서로 우버를 택한 것에 불과할 수 있지만 현지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달랐다. 주요 스포츠 경기와 콘서트, 이벤트가 열리는 베를린 인기 명소에 독일 명차 브랜드 대신 미국의 공유 차량 플랫폼 간판이 붙으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독일인 입장에서 미국 업체에 안방을 내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난달 21일 우버 아레나 앞에서 만난 베를린 시민 하나(23)는 “우버 아레나는 일단 이름부터 멋있지 않고(boring), 무엇보다 독일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 고작 20년 된 ‘중국 자동차 업체’에 밀렸다독일 자동차업계에 왜 한꺼번에 위기가 찾아왔을까. 2000년대 이후 자동차산업이 아시아 중심으로 재편된다고 일찌감치 간파한 토마스 풀스 독일경제연구소(IW) 수석연구원은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과거 독일차를 성공으로 이끈 △적극적 수출정책 △기술 선도 △프리미엄 전략이 2018년부터 흔들렸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최근 ‘트럼프 관세’가 보여주듯 보호무역주의가 재등장해 수출로 먹고사는 독일차를 위협했고, 전기차로의 전환은 독일의 기술적 우위를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원인은 내부에도 있었다. 그는 “2023년 말 정부가 전기차 보조금을 철회한 것은 시기적으로 매우 부적절했다”며 “그로 인해 독일 전기차 시장이 붕괴됐다”고 꼬집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독일의 에너지비용이 천정부지로 오른 것도 업계에 큰 부담이 됐다. 전기차를 충전해서 타야 하는 소비자도 마찬가지다.
이 중 가장 뼈아픈 건 중국차의 부상이다. 폭스바겐의 사세를 흔든, 비야디 오토(BYD Auto)는 고작 설립된 지 20년밖에 안 된 신생업체다. 배터리 전문업체인 모기업(BYD)에 힘입어 전기차에 올인한 결과, 2023년 중국의 터줏대감이던 폭스바겐 판매량을 추월했다. 비야디뿐 아니라 니오(NIO), 샤오펑(Xpeng) 같은 중국 업체도 독일차에 위협적 존재가 됐다.
▲ 중국의 빠른 속도 vs 느려터진 독일 정부‘‘자동차 교황’으로 불리는 전문가 페르디난트 두덴회퍼 자동차연구센터(CAR) 소장은 전화인터뷰에서 “가장 큰 문제는 느려터진 공공부문(Public sector)”이라고 직격했다. 인터뷰 내내 ‘차이나 스피드’를 강조한 그는 “중국은 의사결정이 매우 빠를 뿐 아니라 배터리 정책도 30년간 일관성을 유지했다”며 “반면 독일 공공부문은 매우 열악하고 느린 데다 행정 절차가 복잡하고 3, 4년마다 정책이 바뀌면서 장기 전략을 세우기 어려운 구조”라고 꼬집었다.
지난 5월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 취임으로 새롭게 출발한 연방정부는 현실을 어떻게 직시하고 있을까. 주무부처인 연방경제에너지부(BMWE)는 한국일보에 “새 정부는 독일을 자동차 생산 중심지로 유지하고 2045년까지 기후 중립 달성을 위해 △전기차를 확대하고 △독일을 자율주행 선도 시장으로 만드는 한편 △배터리와 연결형 모빌리티 등 기술투자를 확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전기차 구매 시 세금을 감면하고 업체에 추가 세제혜택을 주는 법안을 마련했으며 현재 입법 절차가 진행 중”이라고 강조했다.
업계를 대변하는 독일자동차산업협회(VDA)도 “독일 내 전기차 10대 중 7대는 독일이 만들었고 올 1분기 한국에 등록된 전기차 5대 중 1대도 독일 브랜드”라며 “베를린(연방정부)과 브뤼셀(유럽연합)이 불필요한 규제를 줄이고 투자에 속도를 낸다면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 “미래 자동차는 중국에서 만들어질 것”그러나 전문가들의 판단은 냉정했다. 두덴회퍼 소장은 “정부가 이제라도 대응에 나선 건 다행”이라면서도 “러시아 위협으로 독일이 재무장을 선언하면서 정부가 예산을 국방비에 쏟고 있어 문제”라고 했다. 국방비가 모든 예산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다는 우려다.
풀스 연구원은 “인구 구조와 도시 중심의 교통 정책 등을 고려할 때 유럽 내수시장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 미국 등) 대륙 간 수출이 관건인데 현실적 대안은 고급차 시장을 지키고 방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독일의 고비용 구조하에서도 가능하고, 독일이 가장 잘하는 분야라서다.
두덴회퍼 소장은 역설적으로 “강자가 된 중국의 배터리, 소프트웨어 업체와 손을 잡아야만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며 “지금까진 독일에서 설계하고 중국에서 차를 생산했다면 앞으론 설계, 디자인도 디지털 기술이 앞선 중국에서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미래 자동차는 중국에서 태어날 것이고, 중국이 독일 자동차 산업의 실제 홈(home)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독일차 전성시대가 이미 끝났다는 말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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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정승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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