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 보광동이었다. 원래 미군들이 공동묘지로 썼던 곳이었는데 지금도 곳곳에 상이군인부락이 남아 있는 곳이다.
6.25직후 타지에서 몰려온 이방인들이 공동묘지 언덕배기에 무허가 판자집을 짓고 삶의 터를 잡기 시작했는데 우리집도 그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당시는 어느 정도 무허가 판자집들이 정리됐지만 옆동네 한남동 언덕배기는 여전히 판자집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그립고 가고픈 그 시절’이라는 제목의 6,70년대 서울 풍경을 담은 영상을 (우연히) 보게되었는데 그 시절의 익숙한 정경들을 마주하고 그만 울컥 울뻔했다. 사람들이 배고프고 힘든 시절을 더욱 잊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야말로 목적의식만 가지고는 살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향수를 자극하는 드보르작의 명곡들을 들을 때 마다 한남동의 판자촌… 이태원 텍사스 골목 등을 떠올리곤 한다. 텍사스 골목은 보광동 한남동 이태원 삼각지대로서 미군들이 드나들던 카바레가 몰려있다해서 동네사람들이 부르던 골목이름이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미군들이 먹다 버린 껌종이들을 모아 딱지놀이를 하고 놀았다. 가끔 미군 짚차가 지나가면 핼로우! 기미 껌 등을 외치며 좇아다니곤 했다. 가을 바람이 몰아치는 텍사스 골목에는 차중락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조영남의 ‘고향의 푸른 잔디’, ‘딜라일라’ 등이 울려나오곤 했다. 당시 한국사회는 유난히 번안가요들이 많이 유행했는데 아마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모두들) 미국을 동경해 왔던 것같다. 바다건너 저멀리에 정말 라스팔마스(낙원)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누구에게나 고향은 있다. 착각 속의 미국땅은 라스팔마스는 커녕 우린 또다시 바다 건너 고향을 그리워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지만, 이는 우리 뿐만 아니라 대 작곡가 드보르작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드보르작 역시 돈 때문에 미국에 온 가난한 작곡가에 불과했다. 엄청난 연봉을 제의했던 미국 뉴욕 음악원의 초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드보르작은 미국에 와서야 비로소 향수의 근원을 찾을 수 있었고 나그네 작곡가로서의 변신(?)에 성공했다. 드보르작이 남긴 대표작들이 모두 아메리카(미국)에서 남긴 작품들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신세계 교향곡’, ‘첼로 협주곡’, 오늘 제목으로 쓴 ‘아메리카 현악 4중주’ 모두 미국에서 작곡된 미국산들이다.
1893년 미 아이오와주 스필빌이라는 곳을 방문한 드보르작은 그곳에서 단 3일만에 현악 4중주 F장조를 작곡하는 영감에 휩싸이게 된다. 아마도 그곳에서 고향 체코를 떠올린 모양으로 깊은 향수를 느끼게 만드는 곡인데, 이곡은 ‘아메리카’라는 제목과 더불어 ‘흑인’이라는 뜻의 ‘니그로’라는 제목도 함께 쓰이고 있다. 흑인 영가, 인디언 민요 등을 수집하던 드보르작에게 있어서 흑인영가가 창작에 큰 영감을 준 사실때문이었다. 드보르작의 현악 4중주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베토벤의 전원(교향곡) 등에서는 느낄 수 없는 향수… 마치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의 노스텔지어가 느껴지는데 이는 (우리) 이민자들 모두가 공감하는, 향수의 동질이자 그 대표작 같은 작품이기도 했다.
그곳이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고향을 잊지 못하는 것은 인간은 추억의 동물이고 회귀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과연 어머니의 품… 고향이 없는 인간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가 음악에서 때때로 향수를 느끼는 것은 음악이 어머니가 있는 집(安)… 편안(便安)함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다. 특히 ‘아메리카’ 현악 4중주같은 곡은 유독 이방인의 향수가 짙다. 마치 어린 시절 외갓집에 갔을 때의 낯설음… 원시적 향수의 동경같다고나할까. 너무도 쉽게 쓰여진 작품… 그러기에 또 멈출 수 없는 그리움의 작품... ‘아메리카’ 4중주가 어려웠던 시절들을 떠올리게 한다. 학교에서 배급주던 옥수수빵… 동네 아줌마들이 계모임이다 뭐다 화투판을 벌이고, 막걸리를 마시고, 이미자의 노래를 합창하던 그 곳… 삶을 부대끼며 서로의 배고픔을 함께 나누던 달동네… 그 시절을 살아 생전 다시 한번 가 볼 수 있을까?
어느새 추석. 드보르작의 현악 4중주를 들으며 꿈 속의 고향으로 달려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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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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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음악산책’ 칼럼 내용이 편집상 실수로 9월19일자 ‘쇼스타코비치의 변명’ 이 다시 게재됐습니다. 이에 ‘음악산책’ 내용을 다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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