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기의 신학자이자 정치사상가 시예예스(Emmanuel Joseph Sieyès)는 “모든 권력의 근원은 국민에게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국민의 권력을 무제한적 폭력으로 해방시키지 않았다. 그가 말한 것은 ‘구성권력(pouvoirconstituant)’이었다. 즉, 국민이 헌법을 만들고 제도를 세울 수 있는 원초적 권능이지만, 일단 헌법이 성립되면 그 권력은 제도 속으로 들어가 법과 절차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민이 스스로 만든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은 자기 모순이며, 그런 파괴는 더 이상 국민의 권리가 아니라 폭력이 된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국민 저항권’이라는 말이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다. 그 주된 발신자는 극우 개신교 목사 전광훈이다. 그는 헌법 질서를 부정하고, 선출된 정부를 향해 ‘하나님이 세우지 않은 정권은 무너져야 한다’며 국민 저항권을 외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저항권은 시예예스가 말한 구성권력의 정신과 정반대에 있다. 시예예스에게서 구성권력은 헌법 창설의 순간에만 발동하는 주권의 근원이지, 일상 정치의 도구가 아니었다. 헌법이 세워진 뒤에는, 모든 국민이 그 헌법의 지배를 받으며, 권력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행사되어야 한다. 그것이 근대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었다.
전광훈의 ‘국민 저항권’은 헌법 이전의 혼돈을 다시 불러들이려는 위험한 수사다. 그는 국민의 이름을 빌리지만, 실제로는 특정 정치 세력과 종교 집단의 이해를 국민의 의지로 둔갑시킨다. 그것은 구성권력이 아니라 ‘사적 권력’이다. 국민이 헌법을 구성할 때 행사하는 권한은 공공선을 위한 것이며, 시예예스는 그 구성권력마저도 공공이익의 위임이라는 한계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전광훈의 저항 담론에는 공공의 선이나 공동체의 책임이 없다. 오직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신적 자기 확신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신앙을 헌법 위에 두려 하고, 교회를 정치 투쟁의 병참기지로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종교개혁 이래 교회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루터는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만 속한다”고 했지, 결코 정치 권력이나 개인의 신념 아래 두지 않았다. 교회가 정치 권력을 축복하는 순간, 신앙은 복음의 자유를 잃는다. 전광훈의 언어는 국민의 자유를 말하지만, 그 자유는 이미 ‘자기 확신의 감옥’에 갇혀 있다.
시예예스의 사상으로 돌아가 보면, 진정한 구성권력은 법과 제도, 그리고 절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제한할 줄 아는 힘이다. 자유란 무제한적 외침이 아니라 자기 통제의 능력이다. 그는 “국민은 헌법을 만들 수 있지만, 헌법 밖에서 통치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 말은 오늘 한국 교회가 귀담아들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이름으로 헌법 질서를 부정한다면, 그 나라는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인간의 왕국이다.
근대 헌정주의는 신정정치(theocracy)의 유혹을 넘어서는 데서 태어났다. 중세의 교황과 제국의 대립, 종교전쟁의 피비린내 속에서 인류는 “신의 이름으로 타인을 지배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헌법은 그 오랜 피의 기억 위에 세워진 사회계약이다. 전광훈식 저항권은 이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 한다. 국민이 만든 헌법을 부정하면서도, 국민의 이름을 빌리고, 민주주의의 언어를 종교적 카리스마로 포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화된 정치 종교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질서와 자유의 긴장 속에서 존재해왔다. 바울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롬 13:1)고 했고, 동시에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고 했다. 이 두 말씀은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이나 무조건적 저항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복음은 언제나 인간의 권력보다 위에 있지만, 그 복음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의 언어로 세상 속에서 작동한다.
지금 한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저항’이 아니라 ‘성찰’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헌법을 부정하는 것은 신앙의 자유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다. 교회가 헌법적 질서 속에서 시민의 양심을 존중할 때, 교회는 비로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 시예예스의 말처럼, 국민이 자신이 만든 헌법을 존중할 때 비로소 진정한 주권자가 된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자신이 세운 언어와 질서를 존중하는 일, 곧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인정하는 일이다.
전광훈식 저항 담론은 책임 없는 자유, 질서 없는 신앙을 낳는다. 그것은 구성권력이 아니라 파괴 권력, 국민의 권리가 아니라 폭력의 신학이다. 기독교는 그런 신학 위에 서 있지 않다. 십자가의 신앙은 언제나 권력을 향한 겸손과 자기 절제의 윤리를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헌법과 신앙이 함께 지켜야 할 공동체의 질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