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모여사의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이에요. 전화할 때마다 없으니 늘 바쁜가봐요." "그랬어요. 메시지를 남기시지." "난 직접 통화하고 싶지 기계에 대고 말하기 싫어서-" 정해진 모임 이외론 조석으로 얌전히 집에 있는 나이다. 혹여 볼 일로 들락거릴 때가 있기에 가까운 이들께는 내 늦은 취침을 알리고 밤 열두시까지는 통화 가능함을 말해놓고 있다. 그리고 급한 용건을 위한 자동응답기가 있어 나중에 반드시 회답을 한다. 그런데 자기 편한 시간에 버튼을 누르고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며 내 부재를 탓하는 건 어쩐지 어색하다.
전화벨 소리에 일손을 멈추고 달려와 수화기를 들었는데 끊어져 버릴 때가 있다. 용무를 보며 미리 무선전화기를 옆에 대기시킬 때가 있지만 그건 특별히 올 전화를 기다릴 때이고 거의 세번 울림으로 멈추는 벨소리엔 맥이 풀린다. "왜 이렇게 늦게 받니"(세 번 울렸는데...) "난 한번이면 재깍 받거든"(맙소사 수화기를 허리에 달고 다니나) 하여튼 오백 스퀘어피트의 좁은 공간이지만 열 걸음 넘는 거리에서 동작을 멈추고 받으러 오는데 세번의 신호만 허용하는 성급함이 이해되지 않는다.
가끔 한국드라마 가운데 대청마루나 응접실의 전화가 여러번 울리는데 천천히 나와서 불편 없이 통화하는 장면을 본다. 내 경우로는 벌써 끊기고도 넘었을 터인데 픽션이라 그럴까? 어떻든 나는 발신음을 충분히 보내며 확인하는 편이다. 베란다나 뒤뜰에서 전화 울림을 듣고 급하게 오거나 작업중에 손 털고 자리 바꾸는 번거로움도 있겠고 그외 보이지 않는 상황을 내 경험에 견주어 넉넉히 기다리는 것이다. 기껏해야 몇십초 안팎인 것을.
오래 전 로터리 폰에서 터치 톤의 새 모델로 바뀌면서 "전에는 다이얼을 천천히 돌리면서 생각할 여유가 있어 좋았는데 이건 방정스럽고 정이 안가요"하던 조카딸의 반응이 떠오른다. 머잖아 얼굴 보며 통화하는 전화기 사용이 보편화되면 감정을 여과시키며 표정관리하는 테크닉까지 연구되는 것 아닐는지 빠른 세태 흐름에 등 밀리는 느낌이다.
이삼일에 한번씩 전화 상으로 온갖 이야기를 잘하는 이가 있는데 어느 날 대뜸 걸려오는 첫 마디가 "자기 전화기 녹슬지 않았어?"이다. 어리둥절하여 머뭇거리는데 "자기 손가락은 굳었나 내가 먼저 전화해야만 되니"한다. 그의 안부가 궁금하기 전에 전화를 받았었고 그 사이 별 용건이 없었는데 통화를 강요하는 듯한 말투가 부담스러웠다. "전화란 필요한 쪽에서 거는 것 아닌가?"로 불편한 심기를 비추긴 했으나 주거니 받거니란 말이 이런 때도 해당되는 것인지 난감하다.
어쩌다 허물없는 사이처럼 친근하게 안부를 물어오는 전화도 있다. 상대방은 당연히 자기를 알 것으로 여기고 대화를 계속하는데 얼른 감이 잡히지 않아 당황할 수가 있다. 전선을 타고 오는 음성은 평시의 음성보다 더 멋있거나 아름다워서 식별에 곤혹스러울 때가 있는데 다행히 수초내에 탐색의 기억 회전이 해결되면 천연스레 가닥을 이을 수 있으나 "저~ 누구 신가요"하는 조심스러운 질문을 하게 되면 여간 거북한 게 아니다. 서로의 음성에 익어있거나 또는 특징이 강한 음색이라고 자신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먼저 스스로를 밝힘으로써 순간의 혼란을 막아줌이 매너가 아닐까.
분명 알아듣는 친구 목소리지만 "나 영수야..."하며 시작되는 통화는 그녀의 부드러운 말씨와 더불어 한결 다정하다. 복잡한 일상의 시간속에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고 있는 우리는 이제 조금쯤은 그 편리함에 어울리는 배려와 여유를 나누며 생활문화의 예의를 격상시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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