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재(한), 다치바나 미사토(일) 주연
카메라는 한동안 길을 달린다. 그 길에는 아무도 없다. 서울의 한 동사무소 직원 우인(이정재)은 자질구레한 일을 위해 동네 좁은 길을 걷는다.
그 길에서 그는 동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미아(김민희)를 만난다. 도쿄에 사는 아야(다치바나 미사토)는 집앞 네거리에서 항상 오른쪽 길로 간다. 가족 누구와도 같이 가기 싫어서이다.
우인에게는 인터넷이란 또 하나의 길이 있다. 그 길을 자주 헤매다 ‘미녀 갤러리’란 사이트에 아사코란 이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야를 보고는 반한다.
모든 인간은 인연의 길 위에 있다. 그곳에서 인연은 모르는 사이에 스쳐가기도 하고, 맞닥뜨리기도 한다.
그 길은 언제나 고독한 현대인들로 넘쳐나고, 그들이 새로운 길을 만든다. 거기에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도 무너진다.
’정사’ 에 이은 이재용 감독의 두번째 영화 ‘순애보’ 는 고독과 길에 관한 정밀한 묘사이다.
고독은 절망과 권태와 어깨동무를 하고는 비현실과 죽음의 길을 꿈꾸게 한다. 미아의 냉대는 우인을 인터넷 속의 아사코에게 더욱 집착하게 하고, 미아는 길 잃은 아이처럼 떠돌며 "빨리 늙기를" 빈다.
금간 유리처럼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가족속에서 재수생인 아야는 비행기를 타고 날짜 변경선에서 호흡을 멈추고 죽으러 돈을 모은다.
’순애보’는 기하학적이다. 데칼코마니처럼 우인과 아야는 정교하게 대칭을 이룬다. 각자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의 한 편의 독립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동시에 인터넷이란 길을 통해 한 점을 향해 간다. 그곳까지 가는 긴 시간(118분)동안 영화는 시소처럼 둘의 일상과 환상을 교차한다.
그들의 일상이란 단순하다. 눈에 거슬릴 만큼 잦은 배설의 반복 아니면 신경이 끊어진 새끼손가락처럼 무감각한 모습, 빈집에 누워있는 무료한 시간들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그 무료한 시간을 관객들에게 웃음과 잔재미로 전환시켜주는데 있다.
’정사’에서 보았듯이 집중력을 위해 배경이나 소도구를 최소화하는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여전하지만 그것이 일상의 냄새까지 없애지는 않았다. 군더더기 없이 앙증맞은 영상과 아무렇지 않게 보이면서도 주제에 접근하는 과정으로 장치된 주변인물들과의 충돌, 그 충돌을 무심하게 받아들이는 이정재의 소시민적 연기가 어우러진 덕분이다.
성격이나 삶의 자세가 정반대인 조연들의 모습, 감독이 좋아하는 영화, 지하철에 걸린 주연배우(김민희)의 실제 광고장면 등이 웃음을 주면서도 주제와 교묘히 연결시킨 재치에서 감독의 계산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알수 있다.
그런 것들을 찾아내 확인하는 재미와, 두 공간(서울과 도쿄, 현실과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의 유사성과 대비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세심함이 있을 때 ‘순애보’ 는 둘이면서 하나가 된다. 아야에게는 성장영화가 되고, 우인에게는 슬픔이 밴 멜로가 된다.
영화는 인터넷에서 나와 처음처럼 텅 빈 길을 달려가 그 둘의 만남을 확인한다. 영화는 우인의 ‘순애보(純愛譜)’ 이고 싶어 했다.
<감독의 말>
"길은 인연의 통로이다. 옛날에는 전혀 불가능한 두 공간의 사람들도 지금은 또 다른 또 다른 길(인터넷)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작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내 경험의 표현들이다.
’정사’가 정제되고 차분한 내 느낌의 한편이라면 반대편에는 알모도바르의 난잡함이나 우디 앨런의 수다가 내게도 있다. ‘순애보’는 그 중간쯤이다. 그 어느 것도 결국은 나의 모습이다. 영화는 감독을 닮는다는 말이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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