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L씨가 좀 만나자고 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를 만나보니 매우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집사람이 집을 나갔어요"한다. 평소 의가 좋은 부부로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말에 나도 충격을 받았다.
"한마디로 너무 철이 없어요. 집사람은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있다구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얼마전 아내의 생일이 되었는데 아내는 턱도 없이 비싼 옷을 사 입겠다고 해서 무슨 그런 비싼 옷을 사느냐고 했더니 그만 집을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혼을 요구한다고 했다.
"아, 내가 바람을 피웠습니까, 술 주정을 했습니까, 때리기를 했습니까, 다만 우리의 내일을 위해 좀더 절약하자고 말한 것밖에 없다구요. 그렇지만 저는 집사람을 정말 사랑합니다. 집사람 없이는 살수가 없어요."
L씨 부인은 상냥하고 예쁜 꿈 많은 소녀 같은 여인이다. 잘 웃고 명랑한 그녀가 왜 그랬을까. 옷 한 벌 때문에 가출을 하다니, 나는 괘씸한(?) 생각이 들어 그녀의 친정 집에 전화를 했다. 가출한지 보름밖에 안됐는데 얼굴이 반쪽이 됐다. 나를 만나서도 돌덩이처럼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더니 차츰 마음을 열고 얘기를 시작했다.
처음 결혼할 때도 거의 강제적으로 했다. 결혼식조차도 "뭘 돈들이고 그런 것을 하느냐"고 하며 내일내일 하다가 아이들이 고등학생들이 된 지금까지 그냥 지낸다고 했다. 생일이라든가 크리스마스 때마다 자기는 무언가 작은 것이라도 선물을 하는데 오늘까지 한번도 무엇을 해준 적이 없다. 심지어 아이들의 용돈도 안 준다.
함께 살게 된 이후, 아내인 자기더러는 아기를 낳은 지 사흘만에 일하러 나가라는 등 재촉을 하면서도 남편은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있던 돈도 축을 낸다. 무슨 약속을 하고도 어기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그 날 생일 건도 그랬다. 며칠 전부터 옷을 사줄게, 자기 입으로 해놓고는 막상 그 날이 되니 내가 언제 그랬냐는 식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 보세요. 제가 언제 비싼 옷 입은 것 보셨어요? 내가 번 돈도 늘 남편에게 다 뺏기고 이렇게 싸구려 옷밖에 못 입어 봤다구요" 한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하, 사정이 어떻게 됐는지 알겠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들은 일이 생각났다. 이런 남편들의 문제는 "가정의 소중함은 알고 있으되 그 중요한 가정의 존속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는" 데에 있다. 가정이 있으므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나 입장이 확실해 지고 아내가 자신들의 삶을 편리하게 해준다는, 가정의 기능성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그 기능을 하게끔 기름을 칠 줄은 모른다. 이런 남편들은 가정에서 아내나 자식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가족을 위해서는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끊임없이 가족들을 이용하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좋은 남편이란 그저 "바람 안 피우고 폭력 안 쓰고 술 주정만 안 하면 되는" 사람인줄 안다. 그리고 사랑을 자신의 책임이나 의무는 접어둔 채 아내에게 의존하는 마음으로 착각한다. "그 사람 없이 난 못살아." 그것이 사랑인줄 안다.
사랑이란 책임과 의무이며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다. 화초에 물도 안주고 돌보지도 않으면서 어느 날 화초가 죽어버렸다고 "내가 화초를 때리지도 않았는데 왜 죽었어?" 하며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데 아내나 자식은 평생 물도 안주고 가꾸지 않아도 절로 늘 푸르고 싱싱할 줄 안다면 큰 오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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