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비극을 당한 미국민들이 충격과 분노에 떨고 있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세운 기독교 정신의 나라다. 기독교 정신이란 예수가 가르친 사랑이 근본이다. 그 사랑이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도주의, 박애주의, 휴머니즘이다. 인종적 편견이나 국가적 이기심을 버리고 인류 전체의 복지증진을 위해 세계가 서로 평등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번 뉴욕의 참혹한 테러 현장을 보고 울분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국제질서와 종교적, 정치적 현실을 떠나 우리는 무고하게 희생된 비행기 탑승객이나 월드 트레이드센터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의 슬픔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이 일에 한인들이 발벗고 나설 때다. 미국민들이 한국민들을 위해 베푼 사랑의 손길을 생각하면 말이다.
일제 치욕에서 벗어나게 된 것도 미국의 2차 대전 승리 덕이고 추위와 배고픔에 허덕이던 한국민을 위해 구호품이란 이름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보내준 것도 미국민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홀로 나뒹구는 수많은 고아들을 거두어 입양시키고 훌륭한 시민으로 키워 준 것도 미국민들이다.
한국이 살만해진 오늘날도 한인 고아를 데려다 친자식보다 더 정성을 들여 키운 감동적 사연들을 전해들을 때마다 미국인들의 휴머니즘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낳은 자식 하나도 잘 키우기 어려운 세상에 어떻게 남의 자식, 고아를 데려다가 친자식과 다름없이 키우고… 그 뿐인가, 아이들이 장성했을 때는 거리낌 없이 낳아준 부모를 그리워하는 입양자식들에게 친부모 찾아 주기를 서슴지 않는 그들. 미국인들의 인도주의적 정신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정신적 가치다.
나는 아직 한번도 한국인이 미국인 어린이를 입양해서 훌륭한 인물로 키워 친부모를 찾아주었다거나,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을 만들어 사회로 내 보냈다는 기쁘고 흐뭇한 소식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남을 도우려고 해도 가진 것이 없을 때는 불가능하다. 적어도 한국민의 과거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유엔에 분담금을 내는 경제규모가 된 나라다. 이제는 습관적으로 남의 도움을 받는 의타심은 버려야 한다. 보다 적극적으로 남을 배려하고 돕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적어도 이 땅에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우리는 의식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에 와 있다. 우리는 한국인이면서 동시에 미국인이다. 또 나아가 이 땅에서 태어난 2세들은 말 그대로 아메리칸일 뿐이다. 미국민의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초기 이민자 그룹을 누가 평소에 영국계 미국인이라고 부르는가.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들을 그냥 아메리칸이라고 부를 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xx계 미국인이라고 호칭하지 않는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우리가 도와야 하는 것은 미국이다. 출가한 여자가 지나치게 친정 편향적 사고를 지니고 살다보면 시댁과 불화를 겪게되어 자칫 결혼생활에 실패할 수도 있다. 우리도 이와 같다. 친정(모국)집에 재난이 닥쳤을 때 고국에 남은 부모형제를 위해 아낌없는 성원을 보낸 것은 옳은 일이다. 하지만 시댁 같은 미국사회, 미국민의 슬픔에 함께 하지 않는다면 진정 이 땅에서 한국인은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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