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다니는 남학생이 부모님과 함께 색맹검사를 받으러 왔는데, 검사결과 색맹이었다. 근시도 있어서 안경을 맞추고, 며칠 있다가 안경을 찾으러 왔었는데, 이 학생의 아버지가 씁쓰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며칠동안 우리 부부가 한국에 통화한 것이 200분도 넘었을 것이다"고 말을 했다.
사연인즉, 아들이 색맹이라는 검사 결과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부가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먼저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 집안이 좀 의심스럽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 동생들이 그렇게 촌스럽게 옷을 입고 다닐 수가 있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아내 역시 질세라 "그러는 당신네 집안은 그렇게 눈들이 좋아서 도수 높은 안경들을 쓰고 다니느냐"부터 사팔증세가 있는 형님네까지 들먹이며 심하게 언쟁을 하고 나니까, 고등학교 다닐 때 문과, 이과 생각이 나더라는 것이었다.
거의 30년 전 한국에서는 고등학교 다닐 때 색맹이 있으면 이과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 부부는 한국에 있는 양쪽 집안 형제자매들에게 국제전화를 걸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제통화가 200분도 더 되었다고 넋두리를 했다.
해서 결과가 어떠했나, 누구네 집안이 색맹이었나를 묻자,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양쪽 집안 형제자매들이 거의 다 이과에 다녔다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내가 미리 설명을 자세히 해주지 못해서 부부싸움까지 갔다고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다. 모든 전문성을 띤 직업들이 그렇듯이 의료 분야 또한 환자들은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우선 사과부터 하고, 궁금한 대목을 설명해 주었다. 아들이 색맹이 있는 경우는 아버지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고, 엄마가 색맹 유전인자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엄마가 색맹이라는 것은 아니며, 이 경우 그 남학생의 외할아버지가 색맹일 확률이 75%, 그리고 외할머니가 색맹 유전자를 보유할 확률이 25%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 남학생의 엄마는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지, 아니면 남편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국제전화를 했던 기억이 새로웠던지 이렇게 한마디하는 것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 아이의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화가이셨단 말이야.”
여기서 참고로 말한다면 색맹이 화가가 될 수 없다는 법은 없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색맹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색약이라고 불러야 옳다. 즉 색약은 적·녹색약이 주로 많은데, 빨간색중 몇가지, 그리고 녹색중 몇가지를 구분 못하는 정도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활하는데 큰 지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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