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LA타임스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다. 16~17년 전에 살인혐의를 받고 멕시코 티화나로 도망가서 살던 미국인이 붙잡혀 왔다. 자녀와 아내를 캘리포니아에 남겨두고 떠난 그는 16년간의 단절의 삶을 뒤로하고 다시 법정에 서게 되었다.
검사는 가장 중요한 증인으로 그의 아내의 법정 출두를 요구했는데 아내가 법정 증언을 거부하며, ‘부부 면책특권’이란 것을 주장했다. 미국처럼 정도 의리도 별로 중시하지 않는 사회에도 결혼의 성역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런 법이 있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가정을 버리고 멕시코에서 다른 여자와 살다가 잡혀온 남편에게 불리한 증언을 회피하기 위해 부부 면책특권을 주장하는 여인이 미국에도 있다는 것이 훈훈히 느껴졌다. 일단 하급법원의 판결은 이러했다. 16년간 부인과 연락도 끊고, 남편으로서 경제적인 지원을 한 것도 아니고, 부부생활도 한 것이 아닌, 즉 실질적 결혼이 아닌 부부에게 부부 면책특권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일리가 있게 들린다. ‘결혼계약 위반이니 결혼이 아니다’는 이야기다.
이 여인의 변호사는 상기 판결에 불복하고 상소하기로 결정했는데, 그의 주장인즉 ‘서신왕래가 있었건, 부부생활을 했건, 경제적 도움을 주었건 아니건 간에 합법적인 결혼관계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부부 면책특권의 보호를 받을 법적인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법에 따르면 이혼이나 사망으로 인한 경우가 아니고는 무엇으로도 결혼을 무효화할 수가 없고, 이들 부부는 살아 있었으며, 이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합법적인 부부로서 면책특권을 받는데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는 주장이다. 이 또한 맞는 이야기다. ‘부부의 의무를 이행함에는 관계없이 검은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약은 지킬 권리가 있다’고 나는 해석한다.
이 여인의 증언 거부 이유는 자녀들에게,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는 증언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해를 하면서도 이런 변명이 어딘가 궁색하게 들린다. 미국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기에 이런 일을 묘사하는 표현에도 한계가 있는 것 같다.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표현으로 이 아내를 변명하자면 이렇다. "사정상 집을 떠나고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고는 하나, 아이들의 아버지이고 함께 살을 섞고 살았던 10여년의 고운 정 미운 정이 있는데, 어찌 법정 증언을 해가며 아이들 아빠의 감옥행에 일조를 한단 말이요? 인륜의 도리로는 할 수 없는 일이오" 이렇게 표현하면 간결하고 가슴에도 와 닿는다.
’인륜의 도리’와 ‘정’이라는 영어로는 번역하기도 힘든 단어들이 나온다. 그만큼 한국식 사고와 미국식 사고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인륜의 도리나 정은 법보다도 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는 것이 한국적 정서이다.
정이란 용어도 없고 의리란 단어는 허약해진 미국사회. 결혼은 하나의 계약(contract)에 불과할 뿐,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이 이혼이다. 이에 비해서, 동양의 전통적인 결혼은 의리와 절개를 중요시하는 어쩌면 강박적일 수도 있는 서약(committment)이 된다.
이 여인의 참 의도는 어디에 있건 간에, 눈이 있는 자의 눈에는 결혼이 계약을 넘어서 서약의 면모를 보여주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들은 신선한 충격을 느낀다. 이민 보따리 속에 붙어서 따라온 우리의 전통과 가치관 중에 아름답고 심오한 것들이 있다. 이런 동양의 정서와 가치관, 의리와 정, 충과 효 등을 가치관 부재의 혼미 속에 빠져드는 미국사회에 차차 소개해 봄직도 하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