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하는 삶
▶ 소니아 장<뉴욕 한흑연대기구 대표>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 어느 틈에 다 성장하였다. 키우는데 정신이 팔려서 어느 틈에 성숙해졌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이제는 무엇보다도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제 사무실 옆에다 아담한 아파트를 구해 가지고 살림을 차려 나갔다. 좋은 짝이라도 만나서 나가는 것 같으면 내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은데 혼자 나가는 게 내 눈에는 왠지 외로워 보인다.
대학교 때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같이 살아본 일은 별로 없지만 제 것 다 찾아 가지고 나가니 이제는 내 품을 완전히 떠나는구나 하는 허전한 마음이다. 옛날 같으면 처녀가 시집가기 전에 어디를 혼자 나가 사느냐고 남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겠지만 지금은 세상이 그렇다 하니 나도 따를 수밖에.
내년이면 아들도 또 그렇게 나가겠구나 생각하니 미리부터 쓸쓸해진다. 그래도 첫 아이한테서 훈련을 받았으니 다음에는 지금보다 좀 쉬워지지 않을까. 그러나 열 손가락 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님이 기억난다.
필요할 것 챙겨주면서 내 머리 속에는 영화 스크린을 보듯 수도 없는 장면들이 쉴새 없이 스쳐간다. 좋았던 일, 나빴던 일, 즐거웠던 일, 어려웠던 일들이 내 가슴속에 그렇게 깊이 파묻혀 있었던 것도 모르고 살았다.
말도 못하는 어린 나이에 몸이 불덩이처럼 끓어올랐을 때 안타까워 쩔쩔매는 엄마를 이해라도 하듯 순진한 눈에 눈물을 가득 채우고 품에 안기던 때, 어디를 다쳐도 아픈 데다 엄마가 키스해주면 아픈 것을 잊어버리던 일, 조건 없이 엄마를 그렇게까지 믿어주던 게 고맙기도 하고 또 이 못난 엄마가 부끄럽기도 했던 일. 바이얼린이 저보다 커서 엄마가 들고 따라다녀 주어야 하던 때,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중국아이라고 한다며 학교 가기 싫어서 아침마다 배가 아프다고 안 일어나 엄마를 울리던 일.
어느 어머니날 몰래 일찍 일어나 그 어린 손으로 아침을 만들어서 들고 오다 엎지르고는 실망하던 얼굴, 엄마가 만든 생일 케익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자랑하고 다니던 일, 고등학교 때 수도 없이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국회 의사당에 인턴 추천되어 갔다 돌아올 때 제 돈 아껴서 잊지 않고 선물을 가방에 잔뜩 채워 가지고 오던 마음.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 혼자 돌아섰다.
태어날 때부터 평생을 같이 살 것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 날이 막상 내 앞에 다가오니 한 마디로 표현할 만한 단어가 나에게는 없다.
생각해 보면 아이들 자라는 과정에서 나도 같이 배우고 같이 성장하였음이 틀림없다.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더니 열심히 배우려 하지 않아도 삶의 과정에서 행복했을 때보다는 고생스러울 때 힘들었던 일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배워지고 현명해지나 보다.
고생을 안 했으면 남의 고생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남을 이해해 준다는 그 자체가 인간이 되어간다는 증거라 본다.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바로 이래서 생겨난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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