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생각
▶ 여주영 <본보 뉴욕지사 논설위원>
낙엽이 떨어지면서 성큼 다가온 겨울은 공포와 불안의 계절이 돼버렸다. 9.11 테러, 탄저, 비행기 추락사고, 전쟁 등으로 죽은 수많은 생명들은 초겨울 추위보다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냉각시킨다. 더불어 예기치 못한 사람들의 이 세상을 떠난 가슴 시린 이야기들이 우리들의 귓가에 너무나 많이 들려온다.
이럴 때는 누구든지 한번쯤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또 삶이 무엇인가 되짚어 보게 된다. 죽음은 삶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다 잘 죽는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잘 죽는다고 하는 것은 잘 사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종교에서는 잘 죽음으로써 영원히 이 세상에서 죽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천당을, 불교인들은 극락세계를 믿음으로써 아무런 염려 없이 살고, 또 편안히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그들에게 내세가 없다면 사는 것은 매우 어렵고 죽는 것도 매우 두려울 것이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장미가시 하나로 죽은 거나 이태백이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은 것은 죽음의 고통이 연상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죽어간 많은 생명들의 죽음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모습이 처참할 대로 처참했다. 그런 것을 보면 깨끗하게 살다 죽는 것도 하나의 커다란 복임에는 분명하다.
안타까운 죽음을 보면서 우리가 원통해 하는 것은 내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조차 내세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죽기를 싫어한다. 이는 결국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이 삶과 죽음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는지 모른다. 죽는 것과 사는 것은 한 순간에 불과하고 종이 한 장 차이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창밖에 마지막 남은 잎새 하나가 떨어지면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하는 한 환자를 보고 화가가 나뭇잎을 그려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준 것이나 그를 살려준 화가가 오히려 병에 걸려 죽었다는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는 삶과 죽음이라는 의미에 특별한 구분이 없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절망적인 생각과 희망적인 생각의 차이에서 얼마든지 오고 갈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삶의 밀도는 시간의 안배에 따라 달라진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소요하고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에 따라 생명의 리듬이 결정된다. 유구한 시간의 흐름, 내일을 당도하는 무한한 가능성, 희망 등은 다가오는 순간 순간들을 어떻게 맞이하는 가에 따라 채색되거나, 혹은 어둡게 물이 든다. 우리가 아름다운 삶의 색채를 만들려면 삶뿐만이 아니라 죽음도 함께 생각해 봐야 한다.
삶의 진정한 가치는 죽음의 경지를 한번쯤 왔다 갔다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고 그런 사람이라야만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죽음이 다가올 때 어떻게 조용하게, 평안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맞을 수 있을 지, 죽은 다음에 자신의 그림과 형태가 어떻게 남아 있을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 평생 사는 동안 이름 없이 누구를 사랑하고 끝없이 자신을 닦아갈 때 죽은 이후에도 우리가 살아있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이별의 슬픔 속에 향기롭게 남아 부활될 수 있지 않을까. 비바람에 무수히 떨어진 나뭇잎을 보면서 죄 없이 죽어간 많은 영혼들의 삶과 죽음의 색깔은 어떠했을까 잠시 상념에 잠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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