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9년 여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취재차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플라사 데 마요 광장에 서서 붉은 벽돌로 지어진 대통령궁을 마주보며, 영화 속에 나오는 에비타를 그려보았다.
영화 ‘에비타’에서 주연 마돈나는 저 대통령궁 2층 베란다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광장 앞에 모인 노동자들에게 단결을 호소했다.
그녀의 옆에 선 남편 후안 페론은 “인민의 폭력은 정의”라고 호소, 노동자의 힘을 업고 대통령에 당선돼 ‘무산대중의 국가’를 건설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파리’라고 불리는 부에노스 아에레스는 유럽풍의 정갈한 도시다. 도시에서 한시간쯤 나가 리오 사미엔토 강을 유람선으로 관광하면, 호화 별장과 방갈로가 해안 삼각주에 즐비하고, 집집마다 개인 요트가 정박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도심으로 돌아오면 사정은 달라진다. 길거리엔 몇푼 안되는 물건을 깔아놓고 하루종일 물건을 파는 노점상과 어린 아이를 업고 구걸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2년전에 부에노스 아에레스에 간 이유는 아르헨티나 경제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99년초에 브라질이 헤알화를 50% 정도 절하하자, 이웃 나라인 아르헨티나가 달러와 페소를 1대1로 교환하는 태환정책을 곧 폐기할 것이라는 분석이 뉴욕 금융가에서 제기됐다.
그때에 이미 아르헨티나 경제는 붕괴 직전에 있었다. 그렇지만 용케 3년을 버틴 것은 국제통화기금(IMF)이 구제금융을 줬고, 미국이 뒤에서 이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60년전 에바가 연설하던 그 플라사 데 마요 광장에 지난주말 시위대들이 몰려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바람에 페르디난도 델라루아 대통령의 정권은 임기를 2년 남긴채 물러나고 말았다.
페론당 출신인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 임시대통령은 지난 23일 취임 일성으로 1,320억달러에 대한 대외채무에 대해 디폴트를 선언하고, 최저임금을 두배 올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야말로 배짱이다. 외국 빚을 갚지 않고, 그 돈을 근로자들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2차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에 버금가는 경제력을 보유한 강대국이었다. 자연자원이 풍부하고 비옥한 땅덩어리에 스페인과 독일계 식민자는 쉽게 잘 사는 나라를 건설할수 있었다. 그러나 이 유럽풍의 아름다운 나라를 망친 것은 바로 페론주의, 즉 무산대중을 위한 포퓰리즘이다.
아르헨티나는 페론과 에바(에비타의 애칭)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페론 장군과 그의 둘째 부인 에바의 이야기는 혁명과 야망으로 점철된 1940년대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페론 부부는 1940년대에 남미식 사회주의를 주창, 민간기업을 국영화하고 노동단체에 막강한 권력을 심어줬다. 페론주의는 오랫동안 아르헨티나를 지배했다. 페론주의를 신봉하는 노조는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근로자들에게 직장을 철밥그릇처럼 보장해주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고,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뉴욕으로 5분간 전화하는데 40달러가 나올 정도로 산업은 경쟁력을 잃고 있었다.
혹자는 IMF가 지나친 요구를 하면서 자금지원을 거부했고, 미국이 이를 방관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가 국가부도를 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비과세 혜택을 받는 40%의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놀고먹는 연금생활자를 줄이라는 요구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선진국 국민들의 세금으로 조성된 IMF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마돈나는 영화에서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마라(Don’t cry for me, Argentina)’며 에바를 노래했다.
그러나 이제 페론과 에바의 국민들은 ‘아르헨티나를 위해 울지 마라(Don’t cry for Argentina)’는 국제 여론을 인식하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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