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윌셔가에 고색창연한 역사적인 건물로만 남아있지만 오래전 윌셔블락스라는 고급 백화점이 있었다. 매년 백화점 중역들의 정기검진을 굳사마리탄 병원에서 담당하고 있었고, 그 당시 종합진료팀의 내과를 담당했던 나는 모든 검사결과를 수집해 진단과 의료상담을 해주었다.
하루는 젊고 아름다운 필리핀계 미국여성이 찾아왔다. 화장품부의 매니저로 부사장급인 30대 중반의 여자로 처음 종합검진을 한다고 했다. 결과는 양호했고 다만 유방암 사진 판독에 조금 의문이 제기되었다. 촉진에서는 만져지지 않았으나 초음파 등의 정밀검사를 더 해본 결과 역시 조직검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환자에게 조직검사의 필요성을 알려주었더니 가족들과 의논해서 결정하겠다고 한다. 며칠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 전화를 했더니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냈는데 첫번 종합검진에 갑자기 이상이 있겠느냐고 몇 달후 다시 유방암검진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사실은 ‘가족주치의’와 상의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알고 보니 가족주치의라는 분은 심령치료를 하는 사람이었고 환자와 가족들은 그와 여러번의 전화끝에 수술이 필요없는 바늘조직검사를 하기로 합의했다.
나는 묘한 기분에 빠졌었다. 현대의학과 심령치료사와의 대결이라… 결과가 암으로 나오기를 바랄 수도 없고. 그러나 결과는 초기 암이었고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초기 암이므로 간단한 유방 부분절제수술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해진 날짜에 환자는 오지 않았고 연락을 해보니 필리핀으로 여행 중이라고 했다. 알고보니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심령치료사를 찾아간 것이었다.
몇달후 다시 환자가 찾아왔다. 암은 만져질 정도로 커졌지만 전체 유방절제수술을 하면 치유 가능성은 높았다. 수술을 하기로 한 날 환자는 또 오지를 않았고 이번에는 멕시코로 간 것이었다. 1년 가깝게 지난 어느날 공항에서 전화가 왔다. 가족들이 환자를 데려오는 중이라는 연락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환자는 몰라볼 정도로 심하게 수척했고 오른쪽 유방은 피부 밖으로 커져나온 암으로 일그러지고 점액과 고름으로 악취를 풍겼다. 재검사 결과는 온몸에 전이된 말기암 상태로 수술은 불가능했다. 항암제 치료는 환자와 가족들이 거부를 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검증이 안된 심령치료법을 들고와 물어보곤 했다. 결국 입원한지 2개월만에 젊은 나이에 그여성은 세상을 떠났다.
현대의학이 완벽하게 병을 진단하고 고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제껏 축적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가장 가깝게 원인을 규명하고 치료할 수 있는 학문이다. 많은 경우에 환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현대의학의 과학적인 방법보다는 편법적인 치료에 의존하고 또 많은 주위의 사람들이 그러한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을 무책임하게 충고해준다.
물론 그런 치료가 모두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치료방법은 정신적이나 면역적 기능강화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진단과 치료는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원칙하에서 고려해봐야 되는 것이다. 지금도 옛 윌셔블락스 건물을 지날 때면 젊고 아름다웠던 그 환자가 가끔 생각이 나곤 한다. 아직도 한창 잘 살고있을 나이인데…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