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관순 열사가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1902년 3월 15일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유중권 씨를 아버지로, 이소제 씨를 어머니로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유 열사는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해 신교육을 받은 선각자다.
1919년 역사적인 3·1 운동이 일어나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했으며 3월 31일에는 매봉산에서 거사를 확인하는 봉홧불을 올렸다. 다음 날 천안 장터에 3,000여명의 군중이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자 일본 헌병들이 무차별 발포, 유 열사의 부모는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집마저 불태워져 유품 한 점 없이 전소됐다.
그 후 유 열사는 천안 헌병대에 끌려 가 인간으로 견딜 수 없는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끝내 동료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공주로 옮겨져 3년형을 받고 상고하여 다시 서울로 호송돼 7년형을 받았다. 유 열사는 서대문 형무소에 이감돼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다. 무수한 폭행과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920년 10월 12일 18살이라는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유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의 주선으로 이태원 공동 묘지에 안장됐으나 1930년 도로 건설로 사라져 흔적조차 알 수 없게 됐다.
유 열사가 가신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 미주 한인들은 물론 한국에서도 그 피 끓는 애국의 얼과 희생 정신은 까마득히 잊혀진 지 오래다. 한국 여성들은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는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이들에게 애국심과 희생 정신을 길러주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심지어 순간의 쾌락과 돈벌이를 위해 몸을 파는 여성이 100만 명이 넘는다는 뉴스는 너무나 충격적이다.
많은 LA 한인 여성들도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며 자녀를 일류 대학에 보내는 데만 정신이 쏠려 있지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시민으로 키우는 데는 관심이 없다. 유 열사의 사상과 유지를 배우는 것은 한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는데도 도움이 되리라 본다. 유 열사 탄생 100주년인 2002년은 LA 한인들이 유 열사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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