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한국에 있는 동서내외가 몇 달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 다 중풍에 걸렸다는 소식이 두고두고 우리 내외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있다. 9월의 어느 날 동서의 몸 한쪽이 갑자기 마비증상을 일으켜 물리치료를 받고있다 하더니 11월에는 처형이 같은 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새해 들어 안부전화를 해 보았더니 동서는 말귀를 알아듣기 힘들었고 처형은 또박또박 말을 끓는데 뒷 끝이 흐렸다. 집안 일을 삼남매가 일주일씩 교대로 돌봐주어 아쉬운 것은 없고 웬만한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다른 처형들의 말에 의하면 만날 때마다 눈물을 훔치는 두 내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속이 상해 같이 울기도 한단다.
2년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4남매를 결혼시키고 수십년간 몸 담아온 고등학교 교직마저 정년퇴직하고 나서 두 내외가 단출하게 살고 있었다. 본디 동서는 과묵한데다가 처신이 엄격하여 처가 식구들은 그를 ‘안동 유대감’이라고 불렀다. 그러하던 그를 20여년이 지난 이순의 나이가 되어 만나보니 두 내외가 천주교에 귀의해 있었고 가끔 소주잔을 기울이며 담배를 나누어 피우곤 했다.
우리가 미국으로 이민 온 뒤 처형은 계주를 하다가 계가 깨지는 바람에 집을 내놓는 빚잔치를 치렀고 그 뒤 보험판매원이 되어 수년간을 고생 끝에 다시 집을 장만하고 4남매를 결혼시키기까지 동서는 한 마디도 아내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다독거려 주어 처형은 남편을 하늘처럼 모시고 산다고 했다. 담배도 계가 터진 뒤 마음이 하도 울적해 재떨이에 남긴 꽁초를 몰래 손대다가 남편이 눈치채고 모르는 척 담배 갑을 두고 가면서 담배가 시름을 달래주는 친구가 되어버렸다고도 했다.
이제 두 내외가 삶의 짐을 훌훌 벗어버리고 자식들 앞에서 지켜야 할 위엄마저 털고 사니 그처럼 평안할 수 없다고 하면서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기를 권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들 내외는 아침 일찍 걷기 운동을 했고 동서는 많은 시간을 붓글씨 쓰기에 보냈다.
그러나 처형은 좀 달랐다. 하루는 구석진 방에서 흘러간 노래가 애절하게 들려오기에 방안을 훔쳐보았더니 처형이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노래 가락에 깊이 취해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심각해 남의 비밀이라도 엿본 듯하여 얼른 그 자리를 피했지만 왠지 슬픔이 전류처럼 가슴에 와 닿았다.
우리는 가끔 자식들이 새 둥지를 틀어 나가고 두 내외만이 남아 살면서 문득 삶의 상흔에 찌든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는 애수를 느낄 때가 있다. 때로는 찢어질 듯한 아픈 육신의 고통을 견뎌내면서 마음 밑바닥에 침잠해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가 되어 허무감을 느끼기도 한다.
또 가족 간에 겪는 애증으로 한이 맺히고 그 한을 가슴에 담아두면서 고독을 반추하기도 한다. 어느덧 낙엽이 지는 의미를 헤아려 볼 나이에 이른 것 같다. 지금 바램이 있다면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 날 밤 잠든 그대로 죽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동서내외의 쾌유를 간절히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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