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이래서 북한을 탈출했다
▶ 이 성(43, 회령출신)
나는 회령 출신으로 43살이다(1958년 12월생). 내 아내는 40살(1961년 12월생)이고 지금 10살짜리(1992년 4월생) 내 딸이 함께 있다. 나는 공장 노동자였고 내 아내는 창고 서기였다. 우리는 북한의 압정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1997년 7월 처음으로 중국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20여일 있다가 붙잡혀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우리는 온성의 국가보위부에서 15일간 심문을 받고 그후 회령 보위부로 넘겨졌다. 그리고는 회령 시경찰로 넘겨져 3일간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 북한 수용소에서 때리고 소리 지르고 하는 것은 기본이다. 우리는 동물처럼 취급당했다. 한번은 경찰서에서 최학송이란 28살쯤 되는 청년 탈북자가 양손이 등뒤로 수갑채워진채 창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살려달라고 소리를 치자 취조관은 그의 양말로 입을 틀어 막았다. 다른 죄수들은 그가 고문을 견디다 못해 남한 기독교인들을 만났다고 털어놓았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 청년은 끝내 감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비밀리 사형에 처해졌거나 종신형으로 강제 수용소에서 보내졌을 것으로 모든 죄수들는 믿었다. 온성출신의 한 여성은 머리채를 창살에 묶인 채 2-3시간 매달려 있었다. 마침내 바닥에 내려졌을 때 그녀의 머리는 뿌리채 한줌이 뽑혀졌다.
1997년 10월1일 석방된지 한달쯤 후 나는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다. 내 아내는 열흘쯤 후 나를 따라왔다.
1998년 6월1일 내 아내와 처제가 중국에서 체포돼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회령 국가보위부를 잠깐 거친후 회령 시경찰에서 10일간 있었는데 이때 그들은 구타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옆방에서 한 중년 여성이 무참하게 매를 맞으며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 여자의 얼굴은 수술 받은지 얼마되지 않아 부기가 있었는데 아마도 유산이었던 것 같다. 그 여자가 왜 그렇게 심하게 매를 맞았는지 내 아내와 처제는 알지 못했다.
1999년 6월22일 중국경찰이 나를 체포했다. 나는 너무 절망적인 나머지 죽어버리려고 쇠젓가락 4개와 숟가락 2개를 삼켜버렸다. 그들이 위수술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냈다. 내게는 아직 그 수술자국이 남아있다. 7월8일 수술에서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로 나는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회령 보위부에 잠깐 머문후 시경찰로 보내졌다. 거기서 16일간 나는 너무 심하게 고문당해서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았고 죽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내가 집에서 숨을 거두도록 석방을 하면서 만약 내가 되살아 나면 다시 경찰서로 불러들이겠다고 했다. 석방된 날 저녁 나는 일시 풀려났던 내 아내와 처제가 다시 체포돼 3년 징역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어물어물 할 것없이 그대로 도망을 쳐서 1999년 8월1일 중국에 도착했다. 그 이후 우리는 삶과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가기로 결심을 했고 중국 경찰에 다시 체포되면 자살을 할 각오가 되어있다. 지금 우리는 그 목적으로 독약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생사 기로에 놓인 우리를 제발 도와주십시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