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이래서 북한을 탈출했다
▶ 최병선 (52.온성출신)
지난 14일 베이징 스페인 대사관에 진입했던 탈북자 25명이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다. 이번 탈북자들의 집단 망명은 한국전 종전이래 최대 규모로 전 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 이들의 망명을 도운 ‘국경 없는 인권’ 단체가 이들을 인터뷰해 작성한 탈출기를 간추려 소개한다.
나는 노동당원이었으며 김일성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북한 정권의 탄압 상을 전 세계에 폭로하기 위해 실명을 사용했다. 나는 온성 용강리 정선구 출신으로 52세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5년 간 군복무를 마친 후 1973년 12월 7일 제대했으며 1997년 3월 7일 탈북할 때까지 온성에 있는 풍인 탄광 광부로 일했다.
군에 있을 때 당원이 됐으며 1982년 김일성과 사진도 함께 찍었다. 김일성과 사진 찍는다는 것은 북한에서는 큰 영광이다. 1976년 8월 30일 결혼했다. 아내는 광산 재고 담당 사무원이었으며 결혼 한 후에는 집단 농장 농원으로 일했다. 당원증과 김일성 사진을 가진 나는 북한에서는 특권층이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탄압과 식량난에 염증을 느끼고 1997년 중국으로 도망쳤다. 우리가 북한을 떠났을 때 내 큰아들은 농부, 나머지 두 아이는 학생이었다. 1997년 2월 나는 식량과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국경을 세 차례 넘나들었다. 네 번째 넘다 국가보위부에 잡혀 12일간 구금됐다. 중국으로 도망쳤다 잡혀 온 탈북자가 100여명 정도 있었는데 모두 폭행 등 짐승 같은 대접을 받았다. 한 젊은이는 총알 다섯 발을 맞은 채 잡혀왔다. 그는 철봉 사이에 손을 넣고 가죽띠로 매를 맞는 벌을 받았다. 어찌나 심하게 맞았는지 손이 큰 빵 덩어리처럼 부풀어올랐다.
당원으로 김일성과 사진까지 찍은 내가 또 다시 도망치다 잡히면 목숨까지 각오해야할 정도로 엄한 벌을 받을 것이란 경고와 함께 풀려났다. 그래도 나는 한국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 생명을 걸었다.
우리 가족은 2000년 3월 큰아들이 체포된 것 이외에는 운 좋게도 중국에 있는 동안 잡히지 않았다. 아들은 키 체인으로 심하게 매를 맞았다고 말했다. 이마에 아직도 그 상처가 남아 있다. 12일간 구금돼 있는 동안 그는 2시간 이상 한 여성이 매를 맞으며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었다. 그는 풀려난 다음날인 1월 24일 다시 중국으로 넘어왔다.
우리는 한국에서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 큰아들은 기독교 선교사가, 내 딸은 피아니스트가, 막내아들은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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