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이래서 북한을 탈출했다
▶ 이선애(16.회령출신)
내 이름은 가명이다. 북한에 있는 친척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명을 쓸 수밖에 없다. 나는 국경 도시인 회령 출신으로 16살 난 소녀다. 내 아버지는 광부고 어머니는 1997년 우리를 버리고 가출한 이래 본 적이 없다. 1996년 중 1 때 학교도 그만 뒀다. 그 후 산 속에서 풀을 뜯어 장에 내다 팔아 연명했다.
나는 1999년 4월 동생과 중국으로 넘어왔다. 배가 고팠고 외부 세계에 호기심이 있었으며 북한은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동생은 14살이고 초등학교 4년 생이다. 새벽에 우리는 허리까지 와 닿는 찬 강물에 뛰어들었다. 우리는 수영할 줄도 몰랐다. 물에 가라앉으면서도 손을 꼭 잡았다. 강 건너 편에 도착했을 무렵 우리는 거의 익사 상태였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 논 앞에서 기절했다.
깨어나자 방안이었다. 북한으로 잡혀온 줄 알았지만 한 농부의 집이었다. 내 동생이 옆에 있었으며 조선족 농부가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설명해줬다. 그는 우리에게 옷과 음식을 준 후 경찰서에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서에 도착해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겁에 질렸다. 오후 한 관리가 와 북한으로 몰래 넘어가면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녁에 두 명의 중국 경관이 우리를 강가로 인도했다. 그러나 우리는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밤에 몰래 넘어 갈 테니 우리를 두고 떠나 달라고 말했다. 두 명의 중국 경관은 의논을 하더니 우리를 두고 떠났다. 우리는 다시 조선족 농부 집으로 가 밤을 지낸 후 엿새를 걷다 조선족 택시 운전사의 도움을 받아 조선족 마을인 룽진에 도착했다. 거기서 옌지 시까지 버스 요금 (2달러)을 준 조선족 여성을 만났다. 옌지에서 조선족 여성이 우리를 한국 선교사에 소개해 줘 성경도 배우고 잘 곳도 생겼다.
2001년 1월 나는 중국 경찰에 체포됐다. 15일간 구금됐었는데 그곳에는 50여명의 탈북자가 있었다. 북한에 도착하자 남녀를 불문하고 알몸 수색을 받았다. 숨겨 놓은 돈이 있나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온성 국가보위부로 끌려가 3일간 조사를 받았다. 나는 매를 맞지는 않았지만 한 남자가 철봉으로 구타당하며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었다. 내가 수감된 온성 수용소에는 40명의 탈북자가 있었는데 일은 힘들고 먹을 것이 거의 없어 고통스러웠다. 남자는 석탄을 캐고 여자는 그걸 날랐다. 나는 발목을 심하게 삐어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나에게 짚으로 밧줄을 꼬는 시켰다.
5일 후 나는 집 근처 경찰서로 보내져 아버지가 데려가게 돼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오지 말라고 기도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셋째 날 경관들이 모두 김정일 생일 축하 파티에 간 틈을 타 보통 때는 잠겨 있는 뒷문이 열린 것을 이용해 빠져 나왔다. 밤에 얼어붙은 강가에 다시 도착했다. 나는 기도를 한 후 다시 강을 건넜다. 거기서 잠을 재워주고 버스 값까지 준 착한 조선족 여성을 만났다.
한국에 가면 뭘 할 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체포와 북한으로 송환될 공포가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내 동생을 찾을 수만 있다면 함께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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