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생각
▶ 신기욱 (스탠퍼드대 사회학·국제학 교수)
며칠 전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갔다.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요즈음 인기 있는 ‘스파이더맨’을 관람했다. 별 내용이 없는 영화이긴 했지만 한 두시간 정도 아이들하고 같이 웃고 떠들다 나오니 기분도 괜찮았다.
또 어렸을 때 한국에서 흑백 TV로 스파이더맨을 보던 생각이 나서 잠시 향수에 젖기도 했다. 하도 오래돼서 그 제목이 잘 기억나진 않지만 스파이더맨인지 거미인간인지 아무튼 만화영화로 보았던 것 같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아이들에게 말을 건넸다. "너희들 거미인간이 뭔지 아니?" 아이들은 아빠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아내는 무슨 그런 촌스런 말을 하냐고 핀잔을 주었다. 스파이더맨이면 어떻고 거미인간이면 어떤가. 아이들과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반가울 뿐이지.
자녀 교육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꼭 나오는 말이 자녀들과의 대화 문제이다. 그런데 대부분 자녀와의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어떤 부모는 "자, 지금부터 대화를 시작하자"고 해 오히려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 코리안 아메리칸 문화를 만들자는 주장도 많이 한다. 코리안과 아메리칸의 유산이 합해진 문화를 만들자는 말이다. 지당한 말씀이고 원론적으론 동의를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 하는 부분에 오면 막막해진다.
난 아이들과 스파이더맨을 보면서 이런 영화를 자녀들과 함께 보는 것이 대화 문제를 푸는데, 또 코리안 아메리칸 문화를 만드는 지름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부모와 자녀 또 1세와 2세가 공유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스파이더맨이 아이들하고 같이 볼만큼 교육적이냐 라는 질문을 할지 모른다. 사실 이 영화는 전형적인 오락물로서 선과 악의 구분 또 ‘권력엔 책임이 따른다’는 정도의 비교적 진부한 교훈 이외엔 별로 시사성이 있는 것도 또 교육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부모와 자녀가 같은 추억을 만들 수 있다면 그 가치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자녀와의 대화가 꼭 말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면서 축구를 함께 하면서 공유하는 부분을 찾아가는 것도 중요한 자녀와의 대화 방법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우리 이민사회는 부모 자녀간의 세대차이 외에 문 차이라는 이중적 어려움을 안고 있다. 어느 사회든 존재하는 부모 자식간의 세대차 이외에도 이민에 따른 문화차이가 있으며 문화적 공감대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이곳에서 자란 2세들이 한국문화와 전통을 잃어 가는 것을 볼 때면 안타깝기도 하고 아쉽기도 해 잔소리를 해대기 일쑤다. 스파이더맨보다는 거미인간으로 기억하기를 바라는 1세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이들이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어떤 문화를 만들어야 하고 또 만들어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다. 왜 2세들에겐 거미인간보다는 스파이더맨이 친근할 수밖에 없고 또 스파이더맨이 코리안 아메리칸 문화의 일부가 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선 별 생각 없이 지나칠 때가 많다는 말이다.
스파이더맨은 할리웃산이지만 내가 어릴 때 서울에서 보던 만화영화이기도 하고 또 수십년이 지난 지금 팔로알토에서 애들과 함께 보는 영화이기도 하다. 한국산 영화는 아니지만 나와 내 자녀들간의 공감대를 형성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저 미국영화라고 가볍게 지나칠 수는 없는 것이다.
문화는 정체된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변한다. 또 코리안 아메리칸 문화의 뿌리가 꼭 한국에서 와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스파이더맨이 자녀와의 거리를 좁히고 코리안 아메리칸 문화를 만드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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