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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영(서울경제 뉴욕특파원)
주한 미국상공회의소(AMCHAM)의 제프리 존스 회장이 지난달 18일 뉴욕에 와서 이런 말을 했다.
“헐리웃 영화사들은 스크린 쿼터제를 폐지하라고 한국 정부에 요구하고 있지만 그것은 최근 한국 영화 산업의 실정을 모르고 하는 얘기입니다. 스크린 쿼터제는 영화관에서 상영일수의 36%를 한국 영화를 상영하도록 의무화하고 있지만, 지난해에는 상영일수의 46%가 한국 영화였습니다. 한국은 영화산업에 많은 투자를 하고, 필름의 내용과 질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도 이제 한국 영화를 더 많이 찾고, 외국 영화의 시장점유율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한국 영화가 좋아졌다는 얘기는 한국 사람들만의 자화자찬이 아니다. 미국의 통상압력에 앞장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AMCHAM 회장마저 한국 영화가 좋아졌기 때문에 스크린 쿼터제 해제가 무의미하다고 인정한 것이다. 임권택 감독이 제5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것도 한국 영화 수준의 수직 상승을 입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칸 영화제 수상작 ‘취화선(醉畵仙)’은 머슴 출신으로 그림에 미친 조선 말기의 천재 화가 장승업을 그렸다.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던 19세기 말엽, 천재화가 장승업은 어느 선비의 도움으로 예술혼을 북돋을 기회를 얻는다. 승업은 신분의 차이 때문에 연정을 키우던 여인을 보내고, 주막을 전전하며 싸구려 춘화를 그려주며 입에 풀칠을 한다. 승업은 타고난 실력으로 이름을 떨치며 궁정화가로로 출세하지만, 이를 박차고 나와 한국적 풍광을 그리며 자유인이 된다는 스토리다.
영화 ‘취화선’의 주인공은 어쩌면 임 감독 자신일지도 모른다. 일제말기인 1936년에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임 감독은 가난에 찌든 어린 시절을 보냈고, 6.25 동란중에 중학교를 중퇴했다. 밥을 굶지 않기 위해 배우나 스태프들의 심부름을 하는 조수로 충무로 영화계를 시작, 삼류 액션, 애정 영화를 찍던 그가 40대가 되면서 자신의 영화세계를 고집했다.
임 감독은 조직폭력배, 벗기기에 물들어 있는 한국 영화의 싸구려 속성을 모조리 불살라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만다라, 서편제, 춘향뎐 등 한국의 혼과 정서가 담긴 작품에 몰두했고, 마침내 세계최고 영화제에서 그 성과를 인정받았다. 취화선은 지금까지 임 감독의 예술적 역량과 성과를 집대성한 작품이라는 평가다.
어쨌든 한국 영화의 국제적인 인정은 지난 50년간 먹고사는 문제에 몰두했던 한국이 경제 일변도에서 벗어나 문화와 예술활동으로 그 영역을 넓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다시 제프리 존스 회장이 제시한 예를 들자면, 10년전에 한국의 음반가게에는 70% 이상이 팝송 등 외국 음반이었지만, 지금은 80%가 한국 음반이다. 한국 청소년들은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좋아하지만 한국 가수들의 노래를 더 좋아한다.
서울의 음반가게를 가보면 1층에 한국 음반이 진열돼 있고, 미국 음반은 2층에 있다. 미국 정부가 스피어스의 CD를 1층에 진열하라고 통상압력을 가해야 할 형편이다.
동아시아에 부는 이른바 한류(韓流) 열풍도 한국의 드라마, 영화, 대중가요가 한 단계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젊은 배우가 중국이나 대만을 가면 팬들이 구름같이 몰려오고, 이를 본 어떤 미국인은 질투심을 느꼈다고 토로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번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가 350만 달러의 수출 계약고를 올렸다고 한다. 최근 개봉된 스파이더맨, 스타워스2와 같은 헐리웃 영화가 3일만에 1억 달러 이상의 대박을 터트리는 것과 비교하면 아기걸음 수준이다. 그러나 한국도 언젠가는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경제는 지난 한 세대 동안 제조업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시뻘건 불기둥과 싸우고 옷에 기름을 묻혀가며 일궈온 하드웨어 경제는 이제 소프트웨어 차원으로 발전하는 단계에 있다. 그 과정에서 임권택 감독의 수상은 한국 경제가 진출할 소프트웨어의 새로운 영역을 보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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