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벌써 대학을 졸업하는구나.
내가 너를 처음 보았을 때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나? 친척이라고는 하나 퀸즈와 뉴저지로 떨어져 살다보니 간간이 소식을 전해들으며 1년에 한두 번 정도 얼굴을 볼뿐이었지.
네가 서너살 꼬마였을 때 아버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홀어머니 밑에서 3남매가 자라오는 이야기는 수시로 들어왔다.
아버지 없이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커오는 너는 초·중·고등학교에서 늘 1등을 놓치지 않는다고 했다. 사춘기가 되어 엄마와 싸운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때로 아이들 런치 머니 걱정을 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워 밤늦게 일하는 엄마를 도와 여름방학이면 갭에서 아르바이트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지난 주말, 드디어 너의 졸업식이었지. 검정 학사모와 가운 차림의 졸업생들이 클라스 별로 줄을 지어 고색창연한 건물, 녹음 무성한 나무, 새파란 잔디밭 옆을 지나 식장으로 향하는 모습은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눈부신 초록과 강렬한 검정의 조화가 그렇게 어울릴 줄이야.
아마도 힘든 공부를 마치고 사회로 첫 발을 딛는 싱그러운 젊음이, 그야말로 그들 앞에 펼쳐진 무한한 가능성에 차마 눈부셔서 그랬을 것이다.
20년도 전, 나 역시 너처럼 긴 생머리를 등 밑으로 찰랑거리며 터질 듯 부푼 가슴으로 졸업식장에 섰었다.
그날, 친구 셋은 4년간 공들인 획득물인 듯, 혁혁한 무공을 자랑하는 훈장을 단 듯 자랑스레 남자친구 팔짱을 끼고 부모 친지 앞에 선보인 날이기도 했지.
그러나 난 그날 아침에 왔다며 어머니가 전해준 전보지의 “축, 합격, 3월 3일부터 출근”이란 취직통지서에 환호했다. 내 앞날은 햇빛 찬란한 신작로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말야 일 가진 여성으로서, 주부로서, 엄마로서 걸어온 길이 너무 힘들어서, 내가 넘어야 할 벽이 너무 높아서 그만 주저 앉아버리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더라.
이제 대학을 졸업하여 당분간 교사를 하다가 로스쿨을 가겠다는 네게 삶의 선배로서 한 두마디 해도 될까?
바깥세상은 확실히 재미있지. 배운 것에 대한 성취감도 맛보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퇴근 후에는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도 많지.
그러나 그 재미에 빠져 있다가 집에 있는 부모가 늙고 병들어 가는 것, 가족간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귀한 시간들을 놓칠 수 있단다. 또 사람들과 지나치게 어울리다보면 혼자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지 못해 더 이상 자신의 발전은 힘들게 된단다.
사회생활에 꼭 필요하긴 하나 적정선을 잘 지켜야 한다. 그러니 너무 늦게 다니지는 말아라.
그런데 쓰다 보니 너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미안하구나.
어쩌다 만나는 나를 보면 너는 늘 다정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바깥 세상에서의 너는 어떤지 모르겠구나. 아이비리그 대학 우등생으로 졸업한 너지만, 얼마나 지성을 갖추었는지 잘 모르겠네.
기자생활 동안 수많은 여성들을 만나고 있지만 학벌과 미모를 앞세운 사람, 교만하고 도도한 사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을 보면 나는 무섭더구나. 그런 사람들은 마음이 불편하여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가 않아.
내가 엉터리 주부에 엉터리 엄마라 때로 식구들에게 미안하고 주위로부터 쌀쌀맞다는 말도 듣는 주제라서 그런지, 실수를 해도 웃어주고 말없이 모자람을 챙겨주는 푸근한 여성이 난 좋더라.
너는 이미 마음이 따뜻하고 착한, 그런 여성인데 내가 너를 너무 무시했니?
졸업식을 보고 돌아가는 내게 너는 차창 밖에서 “에이 플러스!”(A+)라고 큰소리로 기쁨과 고마움을 표시했지만 오늘 나의 잔소리에 “디 마이너스!”(D-)라고 정정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가지, 너의 생긋 웃는 미소만은 백만 불 짜리다. 우울하고 괴로운 사람이 너의 미소로 인해 기분이 활짝 갠다면, 너로 인해 주위가 행복하다면 너는 사회생활에 성공한 여성이 될 것이 틀림없다. 너의 미소를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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