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종소리에 깨어보니 벌써 대-한민국 선제 골이 폴란드 골대로 들어 간 뒤였다.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물러나겠다는 황선홍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그의 절묘한 논스톱 왼발 슛은, TV에서 여러 번 다시 보여 주었다. 청룡팀이 아시아를 제패했을 때 센터포드 이희택은 자신의 슛은 정강지의 정확한 어시스트 덕분이라고 했다. 이번에도 대타로 들어선 이을룡의 멋진 어시스트가 첫 골로 이어 졌음이 더욱 부각되었으면 좋겠다.
전반이 끝나고 비싼 광고가 쏟아져 나올 때는 출근 준비하느라 화장실을 들랑거렸다. 다시 켜보니 유상철이 중거리 추가 골을 넣은 직후였다. 경기가 끝나자 짧은 수면인데도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태평양 너머 알아듣지도 못하는 스페니쉬로 시청했는데도 흥분이 넘쳐 나는데 그 시간 고국의 밤은 얼마나 신바람이 났겠는가. 자랑스런 고국을 뽐내고 싶어 종일 입이 가려웠다.
라디오로만 축구중개 되던 시절, 아나운서는 딴청을 피우다가도 한국팀이 볼을 잡으면 열을 올리기 때문에 언제나 한국팀이 우세한 줄 알았는데, TV가 출연하는 바람에 전력이 들통나 버렸었다.
그런데 폴란드와 싸우는 한국은 눈을 씻고 보아도 믿어지지 않는 팀이었다. 고질병인 문전 앞에서 침착성을 잃기, 한 방법 한 길로만 공격하기, 수비면 수비 공격이면 공격 자기 직책(?)에만 충실하기, 자신이 넣으려는 욕심, 이 모두를 말끔히 쓸어낸 강 팀 이였다. 알람을 시합 정시보다 늦게 해놓은 이유는 조마조마한 게임을 전부 다 보기가 싫어서였다. 그러나 키 큰 동유럽사람들과의 시합인데도 제공권 장악. 스피디하고 악착같은 공격 방어, 무엇보다도 흐름을 타는 자신만만한 모습들이 감동적이었다. 저렇게 되기까지 지옥 훈련을 견디어 낸 태극전사들의 <하면 된다.> 그 자신감이 온 나라 안으로 확산되리라.
12번째의 선수라는 붉은 악마의 성숙되고 열성적인 응원, 사실 붉은 색은 우리들 어린 시절, 좌익 적색이래서 시골 운동회 날도 홍군대신 백군으로 바꾸어 버렸었다.
그러나 미국에 와보니 각 상품의 선두 그룹의 포장은 붉은 색이었다. 코카콜라 말보르 담배처럼, 붉은 색은 적극적이고 선동적이다. 거기다가 악마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는 욕심쟁이 아닌가. 하얀 천사가 응원했다면 시합은 박진감이 없었을 터이다. 머리 터지게 싸우는데 천사는 무슨 천사, 그래서 악마 중에서도 최악 붉은 악마라고 했나보다.
미국 신문에서 월드컵 축구 관련기사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돋보기가 필요하다. 기껏해야 주최국에서 16강에 들지 못한 예는 없다. 이번의 한국팀말고는, 이런 기사 정도이다. 헬스클럽 매니저도, 고객들도 그들은 축구에 관심도 없고 룰도 모른단다.
수요일 아침, 샌드위치 배달하는 젊은이가 툴툴거리며 들어섰다. 축구가 보링보다도 인기 없는 나라가 왜 우승 후보 포르트갈을 이겨 버렸느냐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는 폴트기 2세 이였다. 아닌게 아니라 미국이 포르트갈을 3대2로 이겼으니 D조는 혼전이다. 그런데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오클랜드 트리븐지는 미국우승 소식을 국내 야구 기사보다도 작게 취급했다. 그러니 미국 선수들은 부담 없이 시합 할 것이다. 한국의 신문은 축구의 승리로 도배하고 온 나라가 북한의 퍼레이드처럼 시뻘겋다. 상대적으로 한국 선수들과 히딩크 감독을 붕붕 띄울수록 만약에 졌을 경우 그들에게 쏟아질 비난, 참담한 수모가 걱정된다.
농구중계를 보고 있는 아들에게 말했다. 한국 축구가 폴란드를 이겼단다. 알아요. 미국도 포르트갈을 이겼어, 알아요. 한국하고 미국이 한판 붙는다. 너는 어딜 응원 하니? 미국 요. 아버지는? 내가 아무리 미국사람이라고 말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할 수 없이(?) 한국을 응원하지. 아들은 TV에서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씨익 웃는다.
마라톤은 함께 달리기만 하는데도 힘이 든다. 빈 골대에 슛은 아무 의미도 없다. 축구는 악착 같이 막는 사람이 있어, 그를 피해 힘겹게 상대의 골대 안에 집어넣어야 멋진 경기가 성립된다. 막는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 감동의 크기가 다르다. 축구는 상대의 발과 자존심을 심하게 묵사발 만들어야 빛나는 운동경기이다.
한반도가 승리의 함성으로 진동하던 날, 상대적으로 폴란드 국민들은 얼마나 큰 허탈감 좌절감으로 힘들어했겠는가. 상대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축구는 사실 매정한 우리들 삶의 한 단면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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