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특파원 코너
▶ 김인영(서울경제 뉴욕특파원)
18일 오전 10시. 뉴욕 맨하탄 32가에는 애국가가 터져나왔다. 뉴욕의 붉은 악마들은 이탈리아와의 월드컵 연장 후반 12분에 안정환이 극적인 역전골을 터트린 감격을 못내 삭이지 못해 길거리로 뛰쳐 나왔다.
누군가가 태극기를 흔들며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선창했고, 나머지 200여명의 한국사람들이 따라했다. 뉴욕 경찰도 질서를 지켜달라고만 할뿐 ‘우리’들의 함성을 넉넉하게 지켜보았다.
뉴욕의 상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아래서 애국가가 이처럼 우렁차게 불려진 적은 없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도 있고, 학생 비자로 유학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국적과 신분은 다를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순간 모두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불렀다.
같은 시간, 뉴욕 플러싱에도 학교를 빼먹은 고등학생들 수십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한시간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어떤 남학생은 태극기를 등에 휘어감고, 성조기가 걸려 있는 플러싱 고등학교로 들어갔다.
저 학생은 분명 미국 시민일텐데, 당당하게 한민족임을 자부하고 싶었을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던 한 시민이 “너희들은 미국인이 아니냐”고 묻자, “우리는 코리안 아메리칸이기 때문에 한국이 이겨서 좋다”고 답했다.
한국-일본 월드컵이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들고 있다. 4,700만 국민이 한몸이 돼서 눈물을 흘리고, 경기장과 길거리를 메운 400만 붉은 악마들은 환호와 갈채로 승리의 기쁨을 함께 했다.
세계 역사는 80년대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이른바 글로벌 시대로 전환됐다. 세계는 단일 시장을 형성했고, 지구촌 뉴스가 CNN을 통해 동시에 전세계로 전파되고 있다.
그 중심에 뉴욕이 자리잡고 있다. 뉴욕 월가의 자본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주변부 국가는 과열과 붕괴를 거듭한다. 그 세계화의 중심 도시 한켠에 자리잡은 한국 타운에는 월드컵을 계기로 강한 민족주의가 발동하고 있는 것이다.
뉴욕에서 함께 응원하고 ‘대~한민국’을 외친 10대, 20대들은 지난해 9월 월드트레이드 센터가 붕괴됐을 때 성조기를 흔들며 미국의 승리를 기원했던 젊은이다. 그러던 그들은 월드컵 경기를 맞아 모국의 국기를 흔들며 한국 응원가를 목이 쉬도록 노래하고 있다.
글로벌 단일시장은 자본을 매개로 전세계 단일시장을 형성하고 있다면, 월드컵은 축구 경기를 매개로 전세계를 하나로 묶고 있다. 세계 단일시장은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여건)과 자본의 힘에 의해 주도권을 형성하지만, 월드컵은 각국 선수의 실력과 기량, 국민의 단결력에 의해 경기가 진행된다.
세계화는 국가와 민족을 무너뜨리고 새로이 형성된 개념이 아니다. 세계화는 여러 민족의 독자적인 문화와 정체성을 인정하는 통합 개념이다. 미국에 일본 음식점이 있고, 세네갈에 맥도널드 점포가 있다.
이탈리아 로마에 한국 음식점이 있고, 서울에 이탈리아 정통 피자집이 있다. 미국은 다민족 국가이지만, 각 민족의 고유한 문화가 인정되고 있다. 매년 뉴욕에는 한인 퍼레이드가 열리고, 얼마전엔 푸에리토리코 행사가 있었다.
월드컵은 세계화의 개념을 확인시켜주는 국제 스포츠 경기다. 단체 운동경기를 통해 각 나라와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은 비단 한국만이 아니다.
멕시코가 미국과의 경기에서 지자, 수백만명의 팬들이 세상이 끝난양 좌절하는 모습이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러시아가 일본에 졌을 때 모스크바 도심에는 성난 시민들이 자동차를 뒤엎는 모습이 TV 화면에 잡혔다.
월드컵은 축구를 통해 나라와 민족이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경기로 자리잡아 나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 정확하게 말하면 한민족은 월드컵을 세계 속에서 한국의 위치를 확인하고, 정체성을 찾는 계기로 삼고 있다.
시민권자이건, 갓 건너온 유학생이건, 한국 기업의 주재원이건 대한민국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은 오는 22일 스페인과의 8강전에 참여하자. 그리고 ‘대~한민국’ 구호에 다섯박자를 치며 한민족임을 또다시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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