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한 달간 열정 속에 살았다.
생전 안 입던 붉은 옷도 입고 붉은 스카프도 둘렀다. 원초적인 목소리로 악을 쓰며 팔이 떨어져라 박수를 치고 양팔을 올려 성원을 보내었다.
해외언론은 한국 4강 신화 요인을 파워, 스피드, 팀웍, 투혼이라고 한다.
나는 빠른 속도감을 갖고 쉬지 않고 뛰면서 사력을 다하는 대표선수들 모습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보았다.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들에게서 달리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보았다.
한국팀의 날카로운 볼이 상대편 네트 쪽으로 높이 들어가자 앞을 막아선 상대팀 선수들이 헤딩을 하려고 일제히 솟아오르던 모습은, 마치 금빛 찬란한 물고기들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몸을 뒤틀며 파도 위를 솟구쳐 오르는 광경이 연상되었다.
한국팀이나 상대팀이나 땀에 젖은 머리를 날리며 질주하는 싱싱한 종아리, 볼의 방향을 쫓아 팡 팡 뛰는 근육 감각, 볼을 서로 뺏으려고 바삐 발을 옮길 때는 마치 탭댄스를 추는 듯 보는 이의 정신을 현란하게 했다.
자신이 목표로 한 한가지 일에 신들린 듯 몰두한 사람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이들의 모습이 온 국민에게 여과 없이 그대로 전달되고 누구나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붉은 옷을 입고 거리 응원에 나서게 했다.
붉은 옷 한가지가 한국민이나 해외동포나, 미국 시민권자나 서류 미비자나, 노인이나 젊은이나, 여성이나 남성이나 모두 하나로 만들어 당당한 조국 사랑을 마음껏 펼치게 했다.
붉은 옷을 입은 한민족은 희망을 보여주었다.
전세계에 한국의 위상을 높여주었고 미주한인들에게는 이민생활의 상처를 치유시키고 조국애의 갈증을 시원스레 해갈시켜주었다.
특히 금강산에서 영빈관 사이의 노던 블러바드를 걸어 다니며 “나는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워요”하고 외치던 1.5세들, 달리는 차량의 창 사이로 몸을 내밀어 태극기를 흔들고 공용주차장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던 2세들은 우리의 꿈, 희망이 퍼덕거리는 생명력을 지니고 살아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이곳에서 태어난 녀석이 어디서 대형 태극기를 사 갖고 오더니 제 방에 걸어놓더라.”“십대 아이가 한국에 가서 살고싶다고 말해요.”
“소형 TV를 들고 야외 현장에 나가 임시로 전선을 연결하여 중계방송을 보았다.”“미국에 20년 이상 살면서 미국 사람 눈치 안보고 대한민국을 외친 것은 처음이다”“밴에 태극기를 달고 다녔다. 타인종들도 마주 경적을 울리며 축하해 주는데 손등에 태극 문양이 있더라.” 등등 월드컵 이야기는 끝이 없다.
대형 태극기를 달고 다니자니 안테나가 망가질 수 있고 주차나 방향을 돌릴 때 시야가 잘 안 보이는 점이 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을 자랑하고 싶어 기꺼이 감수한다는 이민 1세, 한국전이 있을 때마다 그전날 밤이나 새벽부터 합동응원장소로 나가고 집에서도 붉은 옷을 벗지 않는다는 1.5세와 2세들. 그들의 해맑은 얼굴에서 한인사회의 미래가 긍정적이고 밝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은 물론 해외동포들에게 들불처럼 번져나간 이 붉은 감동은 평생을 두고 잊을 수도, 잊혀지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 살아가면서 2002년 6월의 기억은 가슴 떨림과 흥분 그 자체일 것이다.
그라운드에서 뛰던 선수들, 경기장을 온통 벌겋게 물들인 관중들, 가정집 TV 앞에서 붉은 옷을 입고 응원하던 가족들, 모두가 희망을 보여주었다.
살다보면 어느 날 갑자기 위기가 바람처럼 달려올 때가 있다. 온 가족이, 온 민족이 하나가 되어 뭉쳤던 이 붉은 마음은 기분이 울적하거나 고약할 때, 부부 싸움을 했을 때, 고단한 삶에 지쳤을 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안식과 위안을 줄 것이다.
위기에 섰을 때, 우리의 빛이 되고 공기가 되고 우리의 마음이 될 것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