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류시화가 쓴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시가 있다.
늘 사랑 속에 살면서도 사랑이 그리울 때가 있듯이 뉴욕에 살면서 한국말의 홍수 속에 있는 가운데서도 한국말이 그리울 때가 있다.
한국 신문을 읽고 한인 커뮤니티에서 한인들을 만나 한국어로 기사를 쓰며 한국음식을 먹으면서도 한국이 그리운 것이다.
특히나 이번에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한국의 붉은 악마와 거리 응원단을 TV로, 뉴욕의 한인 성원을 옆에서 보면서 자꾸 잊어버려 가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에 대해 새삼 떠올리게 된 것이다.
간혹 생각치도 않았던 의외의 장소에서 한국말을 들을 때가 있다.
맨하탄 다운타운 델리 그로서리에서 계산을 하려고 섰다가 “안녕하세요”하는 한국말이 들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캐셔가 한인인 경우가 여러 번이었다.
또한 백인들이 주로 찾는 일본 식당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멀리서부터 뛰어온 기모노 차림 여성이 한국말로 “이쪽으로 와서 기다리세요”하고 대기실로 안내해 주었을 때, 뉴욕에서 두 시간 거리인 샤핑몰 매장에서 일본여성이겠거니 한 매장 직원이 “어떻게 도와드릴까요?”하고 한국말을 할 때 갑자기 나는, 서서 기다려도 되지만 어쩐지 대기실로 꼭 가야만 할 것 같고 그 매장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사주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덟 시간을 달려간 관광지 기념품점에서도 “무얼 찾으시냐?”고 한국말로 묻는 순간 오히려 듣는 내가 당황한 적도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가장 기뻤고 반가웠던 한국말은 10년 전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깜빡 정신을 놓았을 때였다.
아주 짧은 순간 모노레일을 타고 빨갛고 노랗고 파란 동심원 수십 바퀴를 돌고있는데 “미세스 민? 미세스 민 정신 차리세요”하면서 찰싹 찰싹 때리는데 화들짝 정신이 돌아오게 한 그 짱짱한 한국말.
눈을 떠보니 회복실로 와있었고 오늘 자기가 나를 돌봐줄 것이라며 약을 먹여주던 그 다정하던 한인 간호사. (그때 정말 고마왔어요)사람들은 극한 상황이나 절대절명의 위기, 과도한 스트레스 속에 있을 때 누구나 모국어를
그리워 하나보다.
오래 전에 취재차 만난, 반세기 가까이 뉴욕에서 살아온 90세 된 노인이 거의 식물인간 상태에서 그를 보살펴주는 흑인 소셜워커에게 매일 잠꼬대처럼 한 말이 “한국 가야지 한국 가야지”하는 한국말이었다.
우리 한인들에게 한국말은 무엇일까?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아도, 어떠한 스트레스도 없이, 다른 일을 정신없이 하면서도 귓속으로 쏙 쏙 들어오는 한국말, 갓난아기 옹알이처럼, 굳이 말이 필요 없이 본능으로, 유사시에 터져 나오는 언어이전의 몸짓이 아닌가 싶다.
나는 때때로 한국 TV 드라마 비디오를 즐겨 본다.
재미있다고 소문난 비디오를 와장창 빌려다 요즘 유행하는 말, 젊은 층의 언어를 습득한다.화려하고 풍부한 어휘, 유려하고도 절묘한 한국식 표현 등이 물 먹인 스펀지처럼 다가오는 그 재미가 보통 아니다.
월드컵 이후 더욱 한국 드라마 비디오를 보려고 드는 10대 아이와 나란히 앉아 청춘 드라마를 보다가 “원 참, 엄마와 딸이 나란히 앉아 키스신을 보다니”하고 자신을 한심해 하다가 궁여지책으로 “일단 먼저 엄마가 본 다음 네가 보아도 될 내용이면 보게 할게” 하며 부모로서의 특권을 여지없이 발휘한다.
교육적으로 보아선 안될 내용이면 “이건 어른 비디오야. 정말 네가 보고싶다면 엄마도 안볼께”하면 아이는 자신은 안 볼테니 엄마 혼자 보라고 선선히 물러난다.
2세 아이들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을 부여하고 한국말 학습을 위해서 한국 TV 드라마가 그만이지만, 아이들보다 어른들은 자신을 위해서, 모국이 그립고 모국어가 고플 때 더욱 한국 TV 드라마 비디오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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